7월, 2026의 게시물 표시

[산티아고 순례길 #21] 칠흑 같은 새벽길의 헤드랜턴과 추억을 담는 순례자 여권(크레덴시알)

이미지
프로미스타의 정겨운 마을 분위기와 남편을 위해 열었던 따뜻한 생일 파티의 여운을 뒤로하고, 저희 부부는 다음 목적지인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ón de los Condes)'를 향해 일찍 길을 나섰습니다. 이른 아침 길을 나설 때마다 마주하는 서늘하고 적막한 새벽 공기는 늘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주곤 했지만, 이날 맞이한 새벽길은 유독 다른 날보다 사방이 캄캄하고 칠흑처럼 어두웠습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길을 걸으며 느꼈던 아찔한 긴장감부터, 조용한 수녀원 알베르게에서 경험했던 포근한 안식, 그리고 비에 젖을까 고이 품고 다녔던 순례자 여권(크레덴시알)에 담긴 소중한 추억들까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시작해 따스한 온기와 감동으로 이어졌던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서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1. 칠흑 같은 새벽길, 스마트폰 플래시와 헤드랜턴의 소중함 사실 저희 부부는 한국에서 순례길을 떠나기 전, 어두운 새벽길 보행에 쓰려고 전용 헤드랜턴을 야심 차게 준비해 왔었습니다. 하지만 여정 중간에 그만 랜턴을 어디선가 잃어버리고 말았고, 결국 사방이 캄캄한 새벽마다 스마트폰 플래시 불빛 하나에 의존한 채 겨우 발밑을 비추며 걸어야 했습니다.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계속 들고 불빛을 비추며 걷다 보니 등산 스틱을 제대로 쥐지 못하거나 두 손을 자유롭게 쓰지 못해 생각보다 신체적인 불편함이 아주 컸습니다. 스페인의 새벽길은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도 인가나 가로등이 전혀 없어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이 몰아칩니다. 자칫 발밑을 제대로 밝히지 못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발목을 삐끗할 뻔한 아찔한 순간을 몇 번 겪으면서, 새벽 출발이 많은 순례길에서는 두 손을 자유롭게 해주는 '헤드랜턴'이 단순한 장비가 아닌 필수 안전용품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만약 순례길을 준비하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짐이 되더라도 반드시 몸에 잘 착용되는 성능 좋은 헤드랜턴을 꼭 챙겨가시라고 강력하게 권...

[산티아고 순례길 #20] 프로미스타(Frómista): 길 위의 천사들과 남편을 위한 근사한 생일 파티

이미지
카스트로헤리스를 떠나 다음 목적지인 '프로미스타(Frómista)'로 향하는 새벽길은 그날따라 유독 더 아늑하고 예쁜 빛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순례길의 새벽을 매번 맞이하지만, 지평선 저편에서 번져오는 새벽빛을 바라보며 걷는 발걸음은 언제나 변함없는 깊은 감동을 선사하곤 합니다. 메세타 평원의 고요함을 가르며 시작된 이날의 여정 역시, 길 위에서 만난 온기 덕분에 평생 잊지 못할 따뜻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1. 길 위의 천사들과 성당에서 마주한 신부님의 온기 순례길을 걷다 보면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가 아주 멀어 지치고 목이 마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마치 신기루처럼 등장하는 감사한 분들이 계십니다. 순례자들을 위해 길가나 쉼터에 과일, 음료, 간단한 빵 등을 준비해 두고 기부금(Donation) 형태로 나누어 주는 이들입니다. 저희는 그분들을 '길 위의 천사'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프로미스타로 향하는 길에서도 어김없이 이 따뜻한 손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길가가 아닌 고즈넉한 작은 성당 안에서 신부님이 직접 순례자들을 반겨주고 계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지친 순례자들에게 따뜻한 차 한 잔과 고소한 빵을 친절하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저희 부부는 성당 안에서 잠시 촛불을 밝히고 감사의 기도를 올린 뒤, 차와 빵을 나누며 신부님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작은 기부금을함에 넣고 나오는 길, 마음속까지 따스한 온기로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2. 마을 축제의 소소한 풍경, 사람 사는 세상의 닮은꼴 길 위의 온기를 품고 부지런히 걸어 마침내 목적지인 프로미스타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저희가 도착한 날은 마을에 작은 축제나 행사가 열리는 날이었는지, 평소의 고요한 순례길 마을과는 달리 북적이고 활기찬 기운이 가득했습니다. 순례자들뿐만 아니라 온 동네 아이들과 부모들이 거리로 나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춤을 추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그...

[산티아고 순례길 #19]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에서 만난 십자가와 고향의 맛

이미지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는 말이 있지요. 전날 메세타 평원의 30km 땡볕 아래서 크게 다투었던 저희 부부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음 날 아침이 오자 서로를 챙기며 조용히 신발끈을 묶고 길을 나섰습니다. 전날 겪었던 가혹한 더위의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시 메세타의 무더위와 싸워야 한다는 두려움이 가득했기에, 이번 일정은 무리하지 않고 거대한 고딕 양식 아치가 우뚝 서 있는 아름다운 마을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까지만 가기로 정했습니다. 1. 화해의 걸음과 메세타 언덕 위 십자가의 울림 스페인 메세타 지대의 날씨는 날이 갈수록 무더움과 황량함을 더해갔습니다. 하지만 뜨거운 대지 위를 걷다 보면 마음을 절로 숙연하게 만드는 풍경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황토색 언덕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길가 중간중간 세워져 있는 나무 십자가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은 순례자들이 저마다 가슴속에 품고 온 소원이나 소중한 사람을 향한 마음, 또는 삶에서 지고 온 마음의 짐을 내려놓기 위해 돌과 꽃, 조그만 끈 등을 올려둔 뜻깊은 장소입니다. 전날 부부싸움으로 무거웠던 마음을 털어내고 신발끈을 묶었던 저희 부부 역시, 언덕 위 십자가를 바라보며 지난 걸음을 돌아보고 남은 길을 무사히 걸어갈 수 있기를 함께 마음 모아 기도했습니다. 길 위의 십자가는 서로에게 서운했던 감정을 지우고 다시 나란히 걷게 해주는 또 하나의 은혜였습니다. 2. 카스트로헤리스와 한국인 알베르게에서 맛본 소울푸드 거대한 고딕 양식 아치가 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산 안톤 수도원 유적을 지나 마침내 카스트로헤리스에 도착했습니다. 이동 거리가 짧았던 덕분에 생각보다 일찍 마을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이곳을 오늘의 목적지로 정한 가장 큰 이유는, 한국분께서 직접 운영하시는 알베르게와 카페가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숙소를 잡고 여유가 생긴 저희는 카페 오픈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 와중에 다른 한국인 순례자들도 소...

[산티아고 순례길 #18] 악명 높은 메세타 평원과 30km 땡볕 속 첫 부부싸움 (feat. 판초우의)

이미지
부르고스에서의 달콤했던 휴식과 맛있는 빠에야의 기억을 뒤로하고, 저희 부부는 다음 목적지인 작은 시골 마을 '온타나스(Hontanas)'를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그동안은 하루에 20km 안팎을 걸었지만, 이때는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오늘은 조금 더 걸어보자!" 라며 욕심을 내어 처음으로 30km가 넘는 장거리 코스를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저희는 몰랐습니다. 이 선택이 순례길 전체를 통틀어 가장 무모하고 끔찍했던 악몽의 시작이 될 줄은 말입니다. 1. 정보 부족이 부른 무모함, 끝없는 땡볕의 메세타 평원 저희가 걷기로 한 그 길이 바로 순례자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황량한 대평원, '메세타(Meseta) 지대' 라는 사실을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막연히 거리만 보고 길을 나선 저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늘 하나, 쉴 곳 하나 없는 끝없는 황토색 벌판이었습니다. 머리 위로는 뜨거운 햇볕이 사정없이 쏟아지는데, 30km가 넘는 길 내내 나무 그늘은커녕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평선 끝까지 오직 황량한 대지만 펼쳐져 있어서, 만약 함께 걷는 다른 순례자들이 없었거나 노란 화살표 이정표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길을 완전히 잘못 들었구나' 하고 지레 겁을 먹었을 정도였습니다. 무지함에서 시작된 무리한 계획 때문에 온몸의 진이 빠지고 다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습니다. 2. 30km 벌판 위에서 터져 버린 부부의 첫 싸움 그렇게 그늘 하나 없는 땡볕 아래를 무작정 걸으며 피로와 더위가 극에 달하자, 결국 그동안 서로를 다독이던 저희 부부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습니다. 이 험난한 장거리 코스를 가자고 우겼던 사람이 바로 저였기에, 극도로 지친 남편의 원망과 불만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의 원망 섞인 말에 저 역시 서운함과 미안함이 복잡하게 얽히며, 순례길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길 한복판에서 ...

[산티아고 순례길 #17] 새벽 일출과 아타푸에르카, 그리고 부르고스의 맛

이미지
산 후안 데 오르테가를 뒤로하고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의 중심 대도시인 '부르고스(Burgos)'를 향해 떠나는 날이었습니다. 캄캄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길을 나섰는데, 지평선 저편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붉은 태양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유난히 해가 뜨는 모습이 멋졌던 그 아침,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일출을 바라보며 걷는 발걸음은 가슴 벅찬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순례자들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는 대표적인 거점 도시답게, 길 위에는 저마다의 빛을 따라 걷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꽤나 활기차게 이어졌습니다. 1. 아타푸에르카의 돌기둥: 수백만 년의 시간을 마주하다 부르고스로 향하는 드넓은 들판을 걷다 보면, 한가운데 여러 개의 돌기둥이 원형으로 웅장하게 서 있는 독특한 장소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낯선 이국땅의 현대미술 작품인가 싶었지만, 알고 보니 이곳은 인류의 아득한 역사와 인근 아타푸에르카(Atapuerca) 지역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뜻깊은 기념물이었습니다. 아타푸에르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흔적이 발견된 유적지 중 하나로, 무려 약 100만 년 전 인류의 화석과 석기가 발굴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거대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순례길은 그저 중세 시대의 종교적 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곳에서는 그보다 훨씬 아득한 인류의 시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습니다. 돌기둥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바람 소리만 들리는 들판에 서니, 수많은 선조가 거쳐 간 과거와 지금의 현재가 하나로 길게 이어지는 묵직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단순히 목적지를 향해 걷는 것을 넘어, 인간의 역사와 삶을 깊이 돌아보게 만드는 순간이었습니다. 2. 웅장한 대성당과 대도시 부르고스의 열기 경건했던 들판을 지나 마침내 부르고스 시내에 들어서자, 그동안 거쳐 왔던 아담한 시골 마을들과는 차원이 다른 활기찬 도시의 풍경이 저희를 반겨주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대도시의 열기와 북적임에 저희 부...

[산티아고 순례길 #16] 손에 닿을 듯한 하늘과 카페 콘 레체, 그리고 추모비의 울림

이미지
한국에 있는 지인들과 가끔 안부를 주고받다 보면 자주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무작정 걷고, 숙소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잠드는 단순한 일상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좋냐"는 물음입니다. 사실 저 역시 순례길 초기에는 앞만 보고 걷기 바빠 그 매력을 깊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체력이 붙고 길에 적응하면서부터, 똑같아 보이던 이 길은 매일 완전히 다른 얼굴로 저희 부부에게 감동을 선물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1. 네모난 지평선과 손에 닿을 듯한 구름: 걸음을 즐기게 된 이유 하염없이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걷는 일은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순례길의 대자연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사진을 남기다 보면 남편에게 자주 건네던 말이 있습니다.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데, 스페인의 들판은 꼭 네모나게 각이 진 것 같아." 지평선 끝까지 탁 트인 대지 위로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손을 뻗으면 당장이라도 몽글몽글한 구름이 손끝에 닿을 것만 같고 머리가 하늘에 닿을 듯한 착각이 들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쉴 곳이 나오면 신발과 양말부터 벗어던지고 간식을 먹으며 쉬기에 바빴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지루할 틈 없이 나타나는 호젓한 오솔길과 아기자기한 시골 마을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걸음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견디며 걷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를 온전히 즐기는 진짜 순례자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저희 부부는 그때의 사진을 꺼내 보며 지인들에게 스페인의 하늘과 들판이 준 놀라운 감동을 한참 동안 자랑하곤 합니다. 2. 여정의 유일한 낙, 카페 콘 레체(Café con Leche)와 시원한 맥주 한 잔 체력이 생기면서 생긴 소소한 재미는 "마을이 나오려면 얼마나 더 가야 하지?" 하고 기대하며 걷는 일이었습니다. 저 멀리 아담한 마을의 지붕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가벼워졌습니다. 마을에 도착해 자그마한...

[산티아고 순례길 #15] 저마다의 사연을 짊어진 길, 그리고 벨로라도(Belorado)의 깜짝 선물

이미지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서의 연박은 지친 저의 몸을 회복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길 위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사연을 깊이 들여다보는 뜻깊은 시간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무작정 앞만 보고 바쁘게 걸을 때는 미처 보이지 않던 다른 순례자들의 모습이, 한걸음 물러서서 쉬어가다 보니 비로소 눈과 마음에 담기기 시작했습니다. 1. 쉼 없이 걷는 청년들과 길 위에서 만난 깊은 사연들 저희 부부는 컨디션에 맞춰 느긋하게 쉬어가며 걷는 편이라 일정을 계속 함께하는 한국인 순례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 청년들은 저희보다 생장에서 훨씬 늦게 출발했음에도 쉼 없이 걸어온 덕분에 이미 서로 많이 친해져 있었습니다. 모나코에서 온 한국인 친구를 비롯해 서로 의지하며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는 청년들의 밝은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또한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저마다의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 이 길을 걷는 이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심각한 병과 외롭게 싸우며 걷고 있는 외국인 순례자를 보며 차마 실례가 될까 봐 완치 여부를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묵묵한 발걸음 자체에 마음속으로 깊은 응원을 보냈습니다. 자폐증이 있는 아들과 함께 온 미국인 부부도 기억에 남습니다. 길을 걸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밝은 미소로 아들과 함께 걷다가도, 식사 시간이 되면 엄격하고 세심하게 아들을 가르치며 함께 밥을 먹는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2. 평범한 일상이 주는 위대한 감사함 길 위에서 마주친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세상에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은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가슴 깊이 밀려왔습니다. 누군가는 대체 왜 사서 고생을 하며 이 머나먼 타국의 길을 힘들게 걷는지 모르겠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길을 직접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묵직하고 가슴 벅찬 감정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도 묵묵히 한 걸음씩 내딛는 이들, 그리고 아들의 ...

[산티아고 순례길 #14] 끝없는 노란 유채꽃 물결, 그리고 내게 찾아온 뜻밖의 몸살과 연박

이미지
나헤라에서 몸을 추스른 남편과 함께 다시 발걸음을 옮긴 곳은, 닭과 암탉의 전설로 유명한 유서 깊은 중세 도시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였습니다. 남편의 몸살도 훌훌 털어냈고 컨디션도 되찾았기에, 이번 여정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길에서 저희는 이번 순례길을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환상적인 대자연의 풍경을 선물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1. 제주도에서도 보지 못한 끝없는 유채꽃의 장관 산토 도밍고로 향하는 길은 발길이 닿는 곳마다 끝없이 펼쳐진 노란 유채꽃밭으로 온통 물들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제주도에나 가야 겨우 볼 수 있었던 유채꽃을, 스페인의 드넓은 대지 위에서 지평선 끝까지 피어난 모습으로 바라보니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장관이었습니다. 맑은 봄 하늘 아래 바람을 따라 노랗게 일렁이는 꽃물결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었습니다.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모든 순간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고, 발길을 멈추고 계속해서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눈앞에 펼쳐진 그 압도적이고 광활한 풍경과 황홀한 감동은 사진이라는 작은 프레임 속에 도저히 다 담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 눈부신 노란빛의 물결을 제 두 눈과 가슴속에 차곡차곡 담아두기로 했습니다. 비록 지나온 길의 포도나무는 앙상해서 아쉬웠지만, 그 마음을 단번에 씻어주고도 남을 유채꽃밭을 바라보며 저희 부부는 풍경이 전해주는 위로를 오롯이 품은 채 묵묵히 걸음을 이어갔습니다. 2. 감탄도 잠시,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낸 마지막 몇 킬로미터 하지만 그 화려하고 감동적인 풍경을 만끽한 기쁨도 아주 잠시였습니다. 목적지인 알베르게를 불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부터, 갑자기 제 몸과 다리가 전혀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약한 체력으로 남편을 따라오느라 쌓였던 피로에, 전날...

[산티아고 순례길 #13] 평범해서 더 오래 기억되는 길: 앙상한 포도나무와 나헤라(Nájera)의 풍경 액자

이미지
나바레테의 아늑한 알베르게에서 한국 비상약을 먹고 푹 자고 일어난 덕분에 남편의 몸살 기운은 다행히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하지만 어제 워낙 심하게 앓았던 터라 아직은 절대 무리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너무 욕심내지 않고, 다음 행선지인 '나헤라(Nájera)'까지만 적당한 거리를 조절해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1. 알베르게의 규칙, 그리고 이른 아침 마주한 앙상한 포도밭 순례길의 알베르게는 아무리 몸이 아프거나 짧은 거리를 가는 날이라 할지라도, 아침 일찍 방을 비워줘야 하는 체크아웃 시간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아픈 남편을 조금 더 재우고 천천히 나서고 싶었지만, 정해진 시간에는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했기에 서둘러 배낭을 메고 새벽 공기를 마시며 길을 나섰습니다. 나헤라로 향하는 길목에서는 유독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포도밭들을 많이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이 세계적인 와인 생산 국가로 워낙 유명하다 보니, 내심 푸른 잎사귀와 탐스럽게 열린 포도 열매를 기대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마주한 것은 끝없는 대지 위에 서 있는 앙상한 가지만 가득한 나무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이국적이고 기이하게 생긴 것이 무슨 나무일까 한참을 궁금해했는데, 나중에 그것이 모두 포도나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푸릇푸릇한 포도밭의 장관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겨울을 견뎌내고 봄을 준비하는 포도나무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2. 강렬한 사건 대신 묵묵함으로 채워진 시골길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헤라로 향하는 길은 신기하게도 머릿속에 남아있는 강렬한 기억이나 대단한 에피소드가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큰 사건 사고 없이, 남편의 컨디션을 살피며 그저 묵묵하게 길을 걸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발걸음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 가득했던 평온하고 조용한 시골길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와 지금 그때의 ...

[산티아고 순례길 #12] 나바레테(Navarrete): 남편의 첫 몸살과 12km의 짧은 하루

이미지
로그로뇨의 따뜻했던 기부제 알베르게를 뒤로하고 나선 길, 이번 목적지는 평소 걷던 거리의 절반도 안 되는 고작 12km 떨어진 작은 마을 '나바레테(Navarrete)'였습니다.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 가장 짧은 코스를 선택한 데에는 남모를 사연이 있었습니다. 늘 제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던 남편이 걷기 시작한 지 열흘 만에 처음으로 심한 몸살이 난 것입니다. 1. 든든했던 동행자의 무게, 그리고 찾아온 몸살 그동안 남편은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꽤나 긴장하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낯선 스페인 땅에서 본인 몸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텐데, 체력이 약한 아내인 저까지 신경 쓰며 걸어야 했으니 신경이 온통 곤두서 있었겠지요. 그러다 이틀 전 주비리에서 만난 청년들과 반갑게 어울리며 마셨던 맥주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긴장이 순간적으로 툭 풀리면서 그동안 누적된 피로가 몸살로 한꺼번에 터져버린 듯했습니다. 몸 상태가 최악이었음에도 이미 예약을 완료해 둔 로그로뇨까지는 가야 했기에, 남편은 정말 이를 악물고 버티며 걸어왔던 것입니다. 로그로뇨 숙소에 도착한 그날 저녁, 도저히 무리해서 걸을 수 없는 남편의 상태를 보고 저희는 다음 날만큼은 무조건 짧게 걷기로 합의했습니다. 매일 저녁 다음 행선지를 미리 예약해 두는 루틴 덕분에, 무리하지 않고 남편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 딱 12km 거리인 나바레테까지만 예약해 둘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길을 나섰을 때, 비록 몸은 아프고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다행히 길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리오하 지방의 경이로운 풍경이 지친 저희 부부에게 큰 위안을 건네주었으며, 맑은 하늘 아래 투명하게 비친 강가와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서글픈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습니다. 항상 앞장서서 저를 이끌어주던 남편이 기운 없이 걷는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참 짠했지만,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기대어 저희는 서로를 다독이며 천천히 걸었습니다. 2. 너무 일찍 도착한 마...

[산티아고 순례길 #11] 로그로뇨(Logroño) 기부제 알베르게에서의 특별한 하룻밤

이미지
로스 아르코스에서 아들 같은 청년들과 따뜻한 삼겹살 파티를 즐긴 다음 날, 저희 부부는 스페인 최고의 와인 고장인 대도시 '로그로뇨(Logroño)'로 향했습니다. 저희 부부가 순례길을 걸으며 생긴 아주 중요한 루틴이 하나 있습니다. 목적지 숙소에 도착해 샤워를 마친 뒤 잠깐 쉬면서, 반드시 그다음 날의 행선지와 알베르게를 미리 예약해 두는 일이었습니다. 순례길에서 시설이 좋거나 평이 좋은 알베르게는 막상 당일에 걸어서 방문하면 이미 예약이 꽉 차서 방을 잡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주로 '왓츠앱(WhatsApp)'을 이용하거나, 왓츠앱이 없는 곳은 이메일을 보내 꼼꼼하게 자리를 확보하고 다녔습니다. 매일 미리 예약을 해두니 걷는 동안 마음이 조급하지 않았고, 조금 늦게 도착하더라도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1. 로그로뇨 기부제(Donation) 알베르게가 준 신선한 경험 이번 로그로뇨에서는 조금 특별하게 기부제로 운영되는 도네이션 알베르게를 예약했습니다. 정해진 숙박비 대신 순례자가 원하는 만큼 성의껏 기부금을 내고 머무는 곳인데, 순례길의 오랜 전통과 정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입니다. 에스텔라 이후로 새벽 일찍 출발하는 습관이 붙어 이날도 비교적 이른 시간에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보다 훨씬 부지런하게 움직인 순례자들이 이미 많았던 탓에, 원하는 침대 위치를 선점하지는 못했습니다. 침대 위치는 조금 아쉬웠지만, 기부제 알베르게 특유의 소박하면서도 경건한 분위기는 저희에게 완전히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은 신선한 흥미로움을 주었습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 호스텔이나 사설 알베르게와 달리, 오직 순례자들을 향한 선의와 봉사로 채워진 공간에 머무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2. 경험해보지 않고는 모를 훌륭한 현지식 저녁 식사 이곳 기부제 알베르게의 진정한 ...

[산티아고 순례길 #10] 새벽 출발의 묘미, 이라체 와인 샘과 아들 같은 청년들과의 삼겹살 파티

이미지
에스텔라에서의 꿀맛 같은 2박 휴식을 마치고 저희 부부는 완전히 재충전된 몸으로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이틀간 머물며 스페인 현지인들의 여유를 눈에 담은 덕분에, 앞으로의 여정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명확한 방향이 섰습니다. 무작정 늦게 걷는 것이 여유가 아니라, 조금 더 일찍 출발해서 목적지에 일찍 도착하면 그 마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아진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힘들어서 숙소에만 갇혀 지냈던 초반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저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새벽 출발을 감행하며 진짜 순례길의 즐거움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1. 어둠을 뚫고 걷는 새벽 출발, 그리고 이라체 와인 샘의 선물 체력이 제법 붙으면서 시작된 새벽 출발은 순례길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둑어둑한 새벽, 랜턴 불빛에 의지해 길을 나서보니 우려와 달리 이미 동트기 전부터 묵묵히 걸어가는 순례자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고요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걷는 발걸음은 낮보다 훨씬 상쾌했고, 목적지에 일찍 다다르면 마을 성당에 들어가 조용히 기도를 올리거나 골목을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는 넉넉한 시간이 선물처럼 주어졌습니다. 드디어 우리가 이 길에 온 이유를 충분히 누리게 된 것입니다.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례길의 명물로 꼽히는 '이라체 수도원의 와인 샘(Fuente del Vino)'에 도착했습니다. 벽면에 달린 수도꼭지를 틀면 진짜 와인이 졸졸 흘러나오는 광경은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정말 놀라웠습니다. 평소 와인을 참 좋아하는 저는 망설임 없이 텀블러에 들어있던 아까운 물을 과감히 버리고, 그 자리에 차가운 와인을 가득 담았습니다. 이날 목적지 숙소에 도착해 맛본 그 와인은 며칠간의 고단함을 싹 잊게 해 줄 만큼 그야말로 달콤한 꿀맛이었습니다. 2. 주비리의 인연을 다시 만나다, 뜻밖의 삼겹살 초대 목적지인 '로스 아르코스(Los Arcos)'의 알베르게에 도착해 짐을 풀었을...

[산티아고 순례길 #9] 에스텔라(Estella)에서의 첫 2박 연박, 비로소 시작된 즐기는 순례길

이미지
푸엔테 라 레이나를 떠나 도착한 다음 목적지는 중세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마을, '에스텔라(Estella)'였습니다. 이곳은 저희가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한 마을에서 2박을 하며 이틀 동안 머문 특별한 장소입니다. 첫날부터 시작된 변덕스러운 날씨와 험난한 길 때문에 몸과 마음이 제법 지쳐 있었기에, 열심히 걸어온 저희 자신에게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선물을 주기로 한 것입니다. 이 이틀간의 멈춤은 서툴렀던 초반의 긴장감을 내려놓고, 진짜 순례길의 매력을 즐기게 해 준 소중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 다인실 알베르게를 벗어난 호스텔에서의 아늑한 휴식 순례길에서 주로 머무는 알베르게는 저렴하고 순례자 분위기를 느끼기엔 좋지만,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서 자야 하기에 소음이나 사생활 면에서 피로가 쌓이기 쉽습니다. 특히 초반 체력 소모가 컸던 터라, 에스텔라에서는 과감하게 다인실이 아닌 작은 호스텔로 숙소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체크인을 하고 보니 기대했던 것보다 방이 훨씬 깨끗하고 아늑해서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따뜻한 방에서 온전한 휴식을 취하다 보니, 문득 여행을 떠나기 전 '힘들면 언제든 하루 더 쉬어가자'고 다짐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저희는 망설임 없이 이곳에서 하루 더 연박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남들은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다음 마을로 바쁘게 떠나갔지만, 저희는 침대에서 늑장 부리며 온전한 우리만의 속도를 선택했습니다. 이틀 동안 한 숙소에 짐을 풀어두고 편안하게 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몸의 피로가 절반은 날아가는 듯했습니다. 2. 스페인 마트 '디아(Dia)'에서 눈뜬 직접 요리해 먹는 즐거움 에스텔라는 아주 큰 도시는 아니지만, 스페인의 대표적인 대형 마트인 '디아(Dia)'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매번 식당을 찾아가 정해진 코스로 나오는 순례자 메뉴를 사 먹는 게 전부였는데, 이 마트를...

[산티아고 순례길 #8] 인체의 신비와 용서의 언덕, 4월 스페인의 칼바람 속 나를 지켜준 두 가지 장비

이미지
대도시 팜플로나에서 한국 라면으로 겨우 위안을 삼고 잠자리에 들 때만 해도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다리는 끊어질 듯 아프고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어서, '과연 내일 아침에 내가 한 걸음이라도 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우려와 달리 다시 걸을 만한 기운이 남아있었습니다. 분명 어제 부서질 것처럼 아팠던 몸이었는데, 하룻밤 눈을 붙이고 일어났다고 다시 배낭을 메고 나설 수 있는 상태로 돌아와 준 것입니다. 매일 밤 방전되었다가 아침이면 어찌어찌 다시 충전되는 우리 신체의 회복 능력에 그저 감탄하며, 저희는 다음 목적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1. 4월 스페인의 매서운 추위, 배낭 무게를 이겨낸 신의 한 수 스페인의 4월은 따뜻할 것이라는 막연한 예상과 달리, 저희가 마주한 순례길 초반의 날씨는 생각보다 훨씬 매서웠습니다. 길을 나선 지 3~4일이 지나도록 쌀쌀한 공기가 몸을 움츠러들게 만들지요. 출발 전 한국에서 짐을 쌀 때, 단 100g의 무게라도 줄여보겠다고 가져갈까 말까 수없이 고심했던 두 가지 물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경량 패딩'과 '기모 레깅스'였습니다. 가방 부피와 무게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하다가 챙겨왔는데, 이 두 장비는 그야말로 이번 여정의 신의 한 수였습니다. 4월의 스페인은 바람이 한번 불기 시작하면 뼛속까지 시려왔기에, 이 두 옷가지가 없었다면 초반에 감기에 걸려 꼼꼼히 다져온 여정을 망쳤을지도 모릅니다. 초반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는 물론이고, 신기하게도 이 옷들은 순례길 중반을 넘어 거의 끝나는 날까지 매일같이 제 몸의 일부처럼 요긴하게 입게 되었습니다. 배낭 무게에 휘둘리지 않고 내 몸을 보호할 보온 의류를 챙긴 제 자신을 칭찬하고 싶은 순간이었습니다. 2. 바람 부는 용서의 언덕...

[산티아고 순례길 #7] 팜플로나(Pamplona)의 씁쓸함과 눈물의 한국 라면

이미지
주비리에서의 고단한 밤을 보내고 마주한 세 번째 목적지는 헤밍웨이가 사랑한 열정의 도시, '팜플로나(Pamplona)'였습니다. 순례길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마주하는 대도시였기에 출발 전에는 기대가 참 컸습니다. 보통 이런 멋진 대도시에 오면 유서 깊은 성당도 구경하고, 활기찬 광장에 앉아 사람 구경도 하며 맛있는 스페인 요리를 즐기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첫 대도시 방문은 낭만적인 관광 대신, 지독한 피로감과 아쉬움으로 가득 찬 하루가 되고 말았습니다. 1. 대도시의 활기 속, 숙소에서 뻗어버린 50대의 현실 체력 첫날의 기상 악화와 둘째 날 비에 젖은 악명 높은 자갈길 내리막을 내려오며 온몸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탓이었습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다리에 과도하게 힘을 주며 걸었더니, 팜플로나에 입성하자마자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지며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알베르게에 도착해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저는 침대에 그대로 뻗어버렸습니다. 창밖으로는 대도시 특유의 활기찬 소리가 들려왔고, 특히 체력이 넘치는 외국인 순례자들은 숙소에 오자마자 짐만 툭 던져두고 옷을 갈아입은 채 도시를 즐기러 바쁘게 나가 바깥은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침대에 누워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언제쯤 저렇게 지치지 않고 길을 즐길 수 있을까?' 하는 깊은 부러움과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 순례길 초반의 현실적인 체력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며, 야속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저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낯선 스페인어 장벽과 지하 식당에서 마주한 먹통 번역기 겨우 정신을 차리고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밖으로 나섰습니다. 하지만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기본적으로 영어를 쓰지 않고 스페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것부터가 큰 장벽이었습니다. 처음 방문한 식당에는 제대로 된 영어 메뉴판이 전혀...

[산티아고 순례길 #6] 이틀 만에 찾아온 첫 후회, 비 내리는 주비리(Zubiri) 자갈길과 따뜻한 샹그리아

이미지
론세스바예스의 거대한 알베르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드디어 순례길의 두 번째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낯선 환경에서의 첫날은 무사히 넘겼지만, 진짜 고생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둘째 날의 목적지는 아름다운 돌다리가 있는 마을 '주비리(Zubiri)'였습니다. 원래 산티아고 순례길은 매일매일이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라지만, 이곳으로 가는 길은 제 상상 이상으로 험난했습니다. 거친 날씨와 험한 길 덕분에 걷기 시작한 지 단 이틀 만에 제 입에서 "내가 여길 대체 왜 온다고 했을까?" 하는 첫 후회가 터져 나오게 만들었던 잊지 못할 하루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1. 비 내리는 악명 높은 자갈길, 나를 살린 등산 스틱 주비리로 가는 길의 마지막 구간은 순례자들 사이에서 '무릎 파괴자'라 불릴 정도로 악명 높은 자갈길 내리막 코스입니다. 하지만 저는 사전에 그곳이 그렇게 험한 길이라는 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날부터 내리던 비가 주비리로 향하는 내내 멈추지 않고 쏟아졌습니다. 빗물에 젖어 미끄러운 진흙과 뾰족한 돌부리들이 뒤섞인 가파른 내리막길은 50대인 저의 무릎과 발목에 엄청난 공포와 하중으로 다가왔습니다. 비바람을 맞으며 미끄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다 보니, 출발할 때의 그 낭만은 온데간데없고 뼈저린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한국에 있는 따뜻하고 편안한 내 집을 놔두고, 사서 이 고생을 하다니.' 하지만 원망할 틈도 없이 그저 묵묵히 걸어야만 했습니다. 만약 한국에서부터 단단히 길들여 온 등산화와 제 손에 쥐어진 두 개의 등산 스틱이 없었다면, 저는 그 험악한 자갈길에서 크게 넘어져 남은 일정을 모두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미끄러운 돌길 위에서 스틱에 온몸의 체중을 의지하며 지팡이 삼아 한 걸음씩 조심스레 내디뎠던 그날, 철저한 장비 준비가 곧 길 위에서의 생명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절감했습니다. ...

[산티아고 순례길 #5] 피레네의 비바람을 뚫고 마주한 론세스바예스: 설렘과 긴장의 첫걸음

이미지
생장의 첫 알베르게에서 묘한 긴장감 속에 첫 밤을 보내고 마침내 순례길의 첫 아침이 밝았습니다. 숙소에서 간단하게 제공해 주는 빵과 커피로 가볍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섰습니다. 신발 끈을 단단히 묶고 배낭을 멘 채 마을 어귀를 나서는데, 온몸에 닭살이 돋는 설레는 기분이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내가 정말 이 길 위에 서 있구나' 하는 감격은 지금 떠올려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제 인생의 본격적인 800km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1. 아쉬운 우회 도로 선택, 그리고 나를 지켜준 동키 서비스 첫날의 원래 목표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이루는 험난한 피레네산맥을 직진으로 넘어가는 '나폴레옹 코스'였습니다.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국경선을 제 두 발로 직접 밟고 넘어가고 싶다는 로망이 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날 산 위의 기상 악화로 인해 안전을 위해 우회 도로(발카를로스 코스)를 택해야만 했습니다. 국경을 밟지 못해 못내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순례길의 첫 교훈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우회 도로 역시 만만한 산길이 아니었기에, 저는 혹시 모를 체력 저하와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과감하게 '동키 서비스(배낭 배송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출발 전 한국에서 걷기 연습을 열심히 했다고는 하지만, 첫날부터 무리해서 무릎을 다치면 남은 여정 전체를 망칠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숙소에 배낭을 맡겨두면 다음 목적지 알베르게까지 가방을 안전하게 배달해 주는 이 서비스 덕분에, 저는 가벼운 몸으로 첫날의 산길을 안전하게 오를 수 있었습니다. 50대 순례자라면 첫날만큼은 체력 안배를 위해 동키 서비스를 활용하시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천해 드립니다. 2. 카미노 닌자(Camino Ninja) 어플과 피레네의 무서운 비바람 길을 나설 때의 날씨는 정말...

[산티아고 순례길 #4] 파리에서의 3박 4일, 그리고 마침내 도착해 누운 생장의 첫 알베르게

이미지
프랑스길의 진짜 시작점인 '생장피에드포르(Saint-Jean-Pied-de-Port)'로 가는 길은 그 자체로 설레는 여행이었습니다. 저는 순례길을 처음부터 너무 비장하고 무거운 '고행의 길'로만 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마음 한구석에 고이 품어왔던 꿈이자 버킷리스트였기에, 이 여정의 모든 순간을 온전히 즐거운 여행의 일부로 만들고 싶었지요. 그래서 저는 곧장 생장으로 가는 대신, 프랑스 파리에서 3박 4일 동안 달콤한 여행을 먼저 즐긴 후에 순례길에 오르기로 결심했습니다. 1. 파리에서의 3박 4일: 낭만 속에서 잠시 잊었던 현실감 산티아고를 걷기 전, 파리에서의 3박 4일은 그야말로 꿈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에펠탑을 바라보고, 골목길의 노천카페에 앉아 크루아상과 커피를 마시며 파리의 낭만을 온몸으로 만끽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저는 제 앞에 어떤 험난한 피레네산맥이 기다리고 있는지, 매일 20km씩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어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버킷리스트를 실현하러 왔다는 행복감과 설렘에 취해, 현실 감각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낸 채 파리의 구석구석을 누볐습니다. 어쩌면 그 대책 없는 낙천성이야말로 오랜 두려움을 깨고 스페인까지 오게 만든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파리에서의 즐거웠던 기억은 순례길 초반, 몸이 고되고 힘들 때마다 꺼내어 볼 수 있는 따뜻한 비상식량이 되어주었습니다. 2. 파리에서 바욘을 거쳐, 기차를 타고 생장으로 향하는 길 파리에서의 달콤했던 3박 4일 일정을 아쉽게 뒤로하고, 드디어 진짜 순례길의 출발점으로 가기 위한 여정에 올랐습니다. 우선 파리 몽파르나스역에서 초고속열차인 TGV를 타고 프랑스 남서부의 아름다운 관문 도시인 '바욘(Bayonne)'으로 향했습니다. 바욘에 도착한 뒤, 다시 생장피에드포르행 완행열차로 갈아타야 했는데 이 기차를 타는 순간부터 몽환적이던 ...

[산티아고 순례길 #3] 50대 완주의 밑거름: 북한산과 둘레길 걷기 연습, 등산화 길들이기

이미지
"50대에 800km를 걸었는데 안 힘들었어?" 순례길을 다녀온 후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출발 전에는 중간에 다치거나 낙오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막상 스페인 길 위에 서니 제 생각보다 훨씬 잘 걷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걷는 여정 자체를 즐기게 되었지요. 50대인 제가 프랑스길을 가뿐하게 걸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은, 출발 전 국내에서 몇 달 동안 꾸준히 했던 '걷기 연습'과 나에게 딱 맞는 '등산화 길들이기' 덕분이었습니다. 1. 내 발을 지켜줄 등산화 고르기와 직접 신고 길들인 시간 순례길 준비의 절반은 '신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일 20km 이상 거친 돌길과 흙길을 걸어야 하기에,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가면 며칠 못 가 물집과 통증으로 길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나에게 맞는 등산화를 찾기 위해 수많은 후기를 찾아보고 매장에 가서 직접 신어보며 꼼꼼하게 골랐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제 발 모양에 편안하게 맞는 등산화를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새 신발을 그대로 스페인에 가져가는 것보다, 새 가죽과 빳빳한 밑창이 내 발에 익숙해질 때까지 길들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저는 등산화를 사자마자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신고, 동네 산책을 갈 때도 늘 챙겨 신었습니다. 그렇게 끈을 묶는 강도를 조절해 보고, 양말 두께도 이것저것 맞춰보면서 신발이 제 발 모양에 맞게 서서히 늘어나고 말랑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 등산화가 제 몸의 일부처럼 편안해져 있었기에, 남들이 물집 때문에 고생할 때 저는 발바닥 통증 없이 가볍게 발을 내디딜 수 있었습니다. 2. 내 집 앞 보물, 북한산에서 기른 단단한 흙길 적응력 다행히 제 집 뒷산이 바로 그 유명한 북한산이었습니다. 평소에도 걷고 운동하는 걸 좋아했지만, 산티아고행을 결심한 이후부터는 새로 산 ...

[산티아고 순례길 #2] 50대에 떠나는 800km, "낙오하면 어쩌지?" 걱정하는 당신에게

이미지
산티아고 프랑스길 800km를 가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단 하나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내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 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중간에 다치거나 낙오해서 부끄럽게 한국으로 돌아오면 어쩌지?" 젊은 친구들이야 타고난 체력과 젊음으로 밀어붙인다지만, 50대인 저는 무릎 관절도 늘 걱정이었고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아 솔직히 출발 직전까지 밤잠을 설칠 정도로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주변에서도 그 나이에 무리하는 것 아니냐며 만류하는 목소리가 있어 마음이 더 무거웠지요. 하지만 저는 '이 생각 하나'를 바꿔 먹은 덕분에 몸도 마음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저와 같은 나이대에 순례길을 고민하시는 분들을 위해, 두려움을 극복한 제 마음가짐과 현실적인 체력 관리 팁을 공유해 드리고자 합니다. 1. "힘들면 하루 더 쉬어가자"는 마음의 여유가 준 선물 순례길은 남들과 겨루는 올림픽 육상 경기가 아닙니다. 남들보다 하루라도 빨리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한다고 해서 상금을 주는 것도 아니고, 늦게 걷는다고 해서 탈락시키는 무서운 심판관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은연중에 앞서가는 사람들을 보며 조급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행기 표를 끊을 때부터 제 자신과 한 가지 아주 단단한 약속을 했습니다. "가이드북에 적힌 매일의 추천 코스에 내 몸을 억지로 맞추지 말자. 걷다가 몸이 조금이라도 신호를 보내면 그 즉시 멈추고, 마음에 쏙 드는 평화로운 마을을 만나면 주저 없이 하루 더 쉬어가자." 이 단순한 다짐이 제 순례길의 모든 풍경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남들이 한 달 만에 걷는 길을 내가 35일, 아니 40일 만에 걸어도 전혀 상관없다는 여유를 가지니 배낭의 무게도, 마음의 부담감도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신기하게도 "중간에 낙오해도 괜찮다, 힘들면 언제든 쉬어가면...

[산티아고 순례길 #1] 내가 800km 프랑스길을 걷게 된 이유: 버킷리스트와 삶의 덧없음 사이에서

이미지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상처와 질문을 안고 스페인으로 향합니다. 누군가는 퇴사 후 미래를 고민하러, 누군가는 연인과의 이별을 치유하러 걷는다고 합니다. 저에게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은 아주 오랜 시간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막연한 버킷리스트이자, 삶의 가장 어두운 터널 속에서 찾아낸 마지막 비상구였습니다. 오늘은 제가 왜 그 수많은 길 중 '프랑스길'을 선택해 800km를 걷게 되었는지, 그 시작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순례길을 망설이고 계신 분들께 작은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1. 마음속 깊이 묻어둔 오랜 버킷리스트의 시작 저는 어릴 적부터 유난히 걷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는 몸을 움직이고, 운동하고, 땀을 흘리는 활동적인 삶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이었는지 방송 다큐멘터리였는지는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이국적인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의 뜨거운 햇살 아래 끝없이 펼쳐진 흙길을 오직 내 두 발과 배낭 하나에 의지한 채 800km가 넘는 길을 걸어간다는 이야기. 그 단순하면서도 치열한 여정은 제 가슴속에 깊은 파동을 일으켰고, 그때부터 "언젠가 내 인생에서 한 번은 꼭 저 길 위에 서리라"는 막연하지만 단단한 버킷리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젊은 날에는 매일 쳇바퀴 돌듯 흘러가는 직장 생활에 치여 여유가 없었고, 결혼을 한 후에는 아이들을 키우고 가정을 돌보느라 제 개인의 꿈은 서서히 뒤로 밀려났습니다. 그렇게 순례길은 일상의 분주함 속에 자연스럽게 잊히는 듯했습니다. 2. 삶의 임계점, 그리고 찾아온 인생의 덧없음 정신없이 살아가면서도 문득문득 삶이 버겁고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이상하게도 잊은 줄 알았던 순례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아, 다 내려놓고 순례길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