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레테에서 나헤라: 메마른 포도밭과 길 위의 액자가 건넨 위로

순례자 전용 숙소인 알베르게는 아침 일찍 길을 나서야 하는 규칙이 있습니다. 몸이 좋지 않은 남편을 조금이라도 더 쉬게 해주고 싶었지만, 서둘러 배낭을 메고 차가운 새벽 공기 속으로 발을 디뎠습니다.

남편의 컨디션 때문에 일정을 줄이고 걸음을 늦췄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느리게 걸었던 덕분일까요. 초봄의 메마른 포도밭, 길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던 사각 철제 액자, 그리고 천 년 세월의 나헤라 수도원까지 만났던 그날의 시간은 유독 마음 깊이 남아 있습니다.

기대와는 전혀 달랐던 초봄의 포도밭

스페인의 대표적인 와인 산지인 라리오하를 지난다고 했을 때, 솔직히 머릿속으로는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린 푸른 풍경을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잎도, 열매도 하나 없이 기이하게 뒤틀린 나뭇가지들만 황량한 대지 위에 끝없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포도나무라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냥 손가락처럼 구부러진 마른 나뭇가지 같았으니까요. 나중에 알고 보니 겨우내 가지치기를 마치고, 4월의 햇살 아래서 새순을 틔우려고 숨을 고르는 중이었습니다.

화려한 초록빛은 없었지만, 묵묵히 땅속 깊은 곳에서 생명을 끌어올리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묘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완성되어 화려한 순간보다, 무언가를 준비하며 견뎌내는 모습이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길 위에서 만난 다정한 선물, 철제 액자

포도밭 사잇길을 지나 묵묵히 걷던 중,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사각형 철제 프레임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별다른 설명도, 안내판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늘과 지평선, 그리고 우리가 걸어온 황톳길을 한 폭의 그림처럼 담아내고 있는 소박한 설치물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스페인의 넓은 하늘과 길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곳을 지나던 우리가 없었다면 완성되지 않았을 풍경이었습니다.

남편과 배낭을 내려놓고 번갈아 가며 그 액자 속으로 들어가 사진을 남겼습니다. 몸은 피곤하고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그 짧은 순간만큼은 고단함이 씻은 듯 사라졌습니다. 조급하게 앞만 보고 달렸다면 그저 지나쳐버렸을 장면이었습니다. 묵묵히 걷다 보면 길이 먼저 다정하게 말을 건네온다는 말을 그제야 실감했습니다.

천 년 역사의 숨결, 나헤라 수도원

그렇게 도착한 나헤라는 중세 나바라 왕국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도시였습니다. 마을 중심에 붉은 절벽을 등지고 웅장하게 서 있는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나바라의 왕 가르시아 3세가 매사냥을 하던 중, 동굴 속에서 빛나는 성모상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세웠다는 전설을 품은 곳입니다. 실제로 제단 뒤편으로 들어가면 그 전설의 배경이 된 서늘한 바위 동굴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발을 들이는 순간 바깥의 햇살과 대비되는 묵직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습니다.

안쪽 왕실 묘역(판테온)에는 12세기 나바라 왕족과 귀족들의 석관이 가지런히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블랑카 왕비의 석관에 새겨진 섬세한 성경 부조는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생생해 한참을 멈춰 서서 들여다보았습니다.

이 수도원의 백미는 기사의 회랑(Claustro de los Caballeros)이라 불리는 안뜰 회랑입니다. 정교한 고딕 양식의 레이스처럼 돌을 깎아 만든 아치 창문 사이로 부드러운 오후 햇살이 쏟아져 내렸는데, 반질반질하게 닳은 돌바닥을 조용히 거니는 것만으로도 하루 종일 쌓였던 다리의 피로와 마음의 번잡함이 차분하게 가라앉았습니다.

2층에 오르면 호두나무를 깎아 성서와 해학적인 인물들을 묘사해 둔 화려한 후기 고딕 양식의 성가대석도 만날 수 있으니, 나헤라에 머무신다면 시간을 넉넉히 두고 구석구석 발걸음을 옮겨보시길 권합니다.

나헤라 길목을 걷는 순례자들을 위한 작은 팁

나바레테에서 나헤라까지는 약 16~17km 정도로 완만한 흙길과 포도밭이 이어져 보통 4~5시간이면 도착하는 비교적 수월한 구간입니다.

다만 공립 알베르게는 오전 8시 전후로 퇴실을 엄격히 마쳐야 하므로, 몸이 좋지 않거나 피로가 쌓인 날에는 무리하지 말고 이동 거리를 짧게 잡거나 퇴실이 유연한 숙소를 알아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나헤라에 도착했다면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은 꼭 들러보시길 권합니다. 크레덴시알(순례자 여권)을 제시하면 입장료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녁에는 마을 바(Bar)에 들러 스페인식 소량 안주인 타파스와 함께 현지 특산 레드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며 하루의 피로를 풀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나헤라로 향하는 하루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던 날이 아니었습니다. 아픈 남편과 이른 새벽에 숙소를 나와, 새순을 기다리는 포도밭을 지나고, 길 위의 액자 앞에서 멈추어 서고, 나헤라 수도원을 둘러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런 날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습니다. 순례길을 계획하고 계신다면, 나헤라를 그냥 지나치는 경유지로만 두지 마시길 바랍니다. 천천히 걸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이 길 위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