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13] 평범해서 더 오래 기억되는 길: 앙상한 포도나무와 나헤라(Nájera)의 풍경 액자
나바레테의 아늑한 알베르게에서 한국 비상약을 먹고 푹 자고 일어난 덕분에 남편의 몸살 기운은 다행히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하지만 어제 워낙 심하게 앓았던 터라 아직은 절대 무리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너무 욕심내지 않고, 다음 행선지인 '나헤라(Nájera)'까지만 적당한 거리를 조절해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1. 알베르게의 규칙, 그리고 이른 아침 마주한 앙상한 포도밭
순례길의 알베르게는 아무리 몸이 아프거나 짧은 거리를 가는 날이라 할지라도, 아침 일찍 방을 비워줘야 하는 체크아웃 시간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아픈 남편을 조금 더 재우고 천천히 나서고 싶었지만, 정해진 시간에는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했기에 서둘러 배낭을 메고 새벽 공기를 마시며 길을 나섰습니다.
나헤라로 향하는 길목에서는 유독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포도밭들을 많이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이 세계적인 와인 생산 국가로 워낙 유명하다 보니, 내심 푸른 잎사귀와 탐스럽게 열린 포도 열매를 기대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마주한 것은 끝없는 대지 위에 서 있는 앙상한 가지만 가득한 나무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이국적이고 기이하게 생긴 것이 무슨 나무일까 한참을 궁금해했는데, 나중에 그것이 모두 포도나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푸릇푸릇한 포도밭의 장관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겨울을 견뎌내고 봄을 준비하는 포도나무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2. 강렬한 사건 대신 묵묵함으로 채워진 시골길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헤라로 향하는 길은 신기하게도 머릿속에 남아있는 강렬한 기억이나 대단한 에피소드가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큰 사건 사고 없이, 남편의 컨디션을 살피며 그저 묵묵하게 길을 걸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발걸음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 가득했던 평온하고 조용한 시골길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와 지금 그때의 사진들을 다시 하나씩 꺼내 보니, 오히려 그 어떤 날보다 그날의 분위기가 선명하게 가슴속으로 다시 밀려옵니다.
화면 가득 펼쳐진 황토색 흙길과 끝없이 이어진 포도밭의 지평선, 그리고 적막할 정도로 고요했던 스페인의 시골 풍경이 주는 평화로움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순례길은 어쩌면 매일 스펙터클한 일이 일어나는 곳이 아니라,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평범한 하루하루가 쌓여 더 오래도록 마음에 깊은 나이테를 남기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3. 길 위에서 만난 천연 액자, 풍경이 예술이 되는 순간
그렇게 아무도 없는 조용한 길을 한참 걷다가, 적막함을 깨고 저희 부부의 발걸음을 단번에 멈추게 한 멋진 공간이 나타났습니다. 순례길 한가운데에 주변 풍경을 커다란 액자처럼 담아낼 수 있도록 철제로 만들어진 독특한 프레임 구조물의 예술 작품이 우뚝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 네모난 액자 프레임 속으로 스페인의 높은 푸른 하늘과 지평선, 그리고 우리가 숨을 헐떡이며 걸어온 조용한 길이 마치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정물화처럼 완벽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묵묵히 걸어온 저희 부부에게 대자연과 이름 모를 예술가가 협업하여 선물해 준 멋진 포토존이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가방을 잠시 내려놓고 그 액자 뒤에 서서 서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주었습니다.
맑은 강가 풍경에 이어 이 소박한 액자 하나 덕분에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조급하게 앞만 보고 걷느라 놓칠 뻔했던 길 위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며, 특별한 이벤트는 없었지만 나헤라로 가는 길을 예술 같은 추억으로 물들인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마치며: 평범한 하루가 주는 위로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도착한 나헤라는 거대한 붉은 암벽이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인상적인 곳이었습니다.
남편의 몸살로 시작해 조용히 포도밭을 걷고 액자 속 풍경에 감탄했던 오늘 하루는, 순례길이 주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위로였습니다. 거창한 기적 없이도 그저 무사히 하루를 걷고 살아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함을 느끼는 저녁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나헤라를 떠나, 스페인의 왕들이 잠들어 있는 유서 깊은 성당과 드넓은 밀밭이 시작되는 중세 도시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로 향하는 여정을 들려드리겠습니다. 평범함 속에서 단단해지는 저희 부부의 여정을 계속 함께해 주세요.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