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16] 손에 닿을 듯한 하늘과 카페 콘 레체, 그리고 추모비의 울림

한국에 있는 지인들과 가끔 안부를 주고받다 보면 자주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무작정 걷고, 숙소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잠드는 단순한 일상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좋냐"는 물음입니다.

사실 저 역시 순례길 초기에는 앞만 보고 걷기 바빠 그 매력을 깊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체력이 붙고 길에 적응하면서부터, 똑같아 보이던 이 길은 매일 완전히 다른 얼굴로 저희 부부에게 감동을 선물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1. 네모난 지평선과 손에 닿을 듯한 구름: 걸음을 즐기게 된 이유

하염없이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걷는 일은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순례길의 대자연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사진을 남기다 보면 남편에게 자주 건네던 말이 있습니다.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데, 스페인의 들판은 꼭 네모나게 각이 진 것 같아."

지평선 끝까지 탁 트인 대지 위로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손을 뻗으면 당장이라도 몽글몽글한 구름이 손끝에 닿을 것만 같고 머리가 하늘에 닿을 듯한 착각이 들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쉴 곳이 나오면 신발과 양말부터 벗어던지고 간식을 먹으며 쉬기에 바빴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지루할 틈 없이 나타나는 호젓한 오솔길과 아기자기한 시골 마을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걸음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견디며 걷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를 온전히 즐기는 진짜 순례자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저희 부부는 그때의 사진을 꺼내 보며 지인들에게 스페인의 하늘과 들판이 준 놀라운 감동을 한참 동안 자랑하곤 합니다.

2. 여정의 유일한 낙, 카페 콘 레체(Café con Leche)와 시원한 맥주 한 잔

체력이 생기면서 생긴 소소한 재미는 "마을이 나오려면 얼마나 더 가야 하지?" 하고 기대하며 걷는 일이었습니다. 저 멀리 아담한 마을의 지붕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가벼워졌습니다.

마을에 도착해 자그마한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마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스페인식 라테, '카페 콘 레체'는 고단한 여정 속 저희 부부의 유일무이한 최고의 낙이었습니다.

때로는 이른 오후 더위를 뚫고 도착한 마을에서 목을 축이던 시원한 생맥주 한 잔의 청량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슴속까지 뻥 뚫어주는 행복이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저희 부부는 문득문득 그때 마셨던 카페 콘 레체의 고소한 맛과 향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아, 그 카페 콘 레체 마시러 순례길 다시 가고 싶다" 하고 웃으며 추억을 나눌 수 있는 명확한 매개체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길을 걸을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스페인 순례길 숲속에서 만난 1936년 내전 희생자 추모비의 모습

3. '1936' 추모비 앞에서 마주한 스페인의 깊은 역사와 아픔

벨로라도를 떠나 다음 목적지인 '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를 향해 한적한 숲길을 걷던 중, 길 한편에 숫자 '1936'이 선명하게 적힌 묵직한 추모비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칠 수도 있었던 작은 비석이었지만, 잠시 멈춰 서서 확인해 보니 1936년 시작된 스페인 내전 당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추모의 공간이었습니다.

푸르고 평화롭기만 했던 숲속 한가운데 자리 잡은 역사적 아픔의 흔적을 마주하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단순히 눈이 즐거운 아름다운 대자연만을 만나는 감상의 길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 땅을 살아간 사람들의 깊은 역사와 잔인했던 아픔, 그리고 그것을 보듬어 안고 흐르는 세월의 숭고함을 함께 마주하고 배우는 삶의 배움터였습니다. 그 숙연한 추모비 앞에서 저희 부부는 잠시 고개를 숙여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조용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마치며: 매일 같아 보여도 단 하루도 같지 않은 길

지인들의 질문에 이제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습니다. 매일 똑같이 걷는 것 같아 보여도, 순례길의 하루는 하늘의 모양도, 마시는 커피 한 잔의 감동도, 길 위에서 마주하는 역사적 깨달음도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었습니다. 몸과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비로소 길이 주는 진정한 매력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산 후안 데 오르테가를 지나,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의 중심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웅장한 대성당이 기다리고 있는 대도시 '부르고스(Burgos)'로 향하는 여정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조금씩 더 깊어지는 저희 부부의 걸음에 계속 함께해 주세요. Buen Camino!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산티아고 순례길 #1] 내가 800km 프랑스길을 걷게 된 이유: 버킷리스트와 삶의 덧없음 사이에서

[산티아고 순례길 #2] 50대에 떠나는 800km, "낙오하면 어쩌지?" 걱정하는 당신에게

[산티아고 순례길 #4] 파리에서의 3박 4일, 그리고 마침내 도착해 누운 생장의 첫 알베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