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14] 끝없는 노란 유채꽃 물결, 그리고 내게 찾아온 뜻밖의 몸살과 연박
나헤라에서 몸을 추스른 남편과 함께 다시 발걸음을 옮긴 곳은, 닭과 암탉의 전설로 유명한 유서 깊은 중세 도시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였습니다.
남편의 몸살도 훌훌 털어냈고 컨디션도 되찾았기에, 이번 여정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길에서 저희는 이번 순례길을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환상적인 대자연의 풍경을 선물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1. 제주도에서도 보지 못한 끝없는 유채꽃의 장관
산토 도밍고로 향하는 길은 발길이 닿는 곳마다 끝없이 펼쳐진 노란 유채꽃밭으로 온통 물들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제주도에나 가야 겨우 볼 수 있었던 유채꽃을, 스페인의 드넓은 대지 위에서 지평선 끝까지 피어난 모습으로 바라보니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장관이었습니다.
맑은 봄 하늘 아래 바람을 따라 노랗게 일렁이는 꽃물결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었습니다.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모든 순간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고, 발길을 멈추고 계속해서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눈앞에 펼쳐진 그 압도적이고 광활한 풍경과 황홀한 감동은 사진이라는 작은 프레임 속에 도저히 다 담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 눈부신 노란빛의 물결을 제 두 눈과 가슴속에 차곡차곡 담아두기로 했습니다.
비록 지나온 길의 포도나무는 앙상해서 아쉬웠지만, 그 마음을 단번에 씻어주고도 남을 유채꽃밭을 바라보며 저희 부부는 풍경이 전해주는 위로를 오롯이 품은 채 묵묵히 걸음을 이어갔습니다.
2. 감탄도 잠시,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낸 마지막 몇 킬로미터
하지만 그 화려하고 감동적인 풍경을 만끽한 기쁨도 아주 잠시였습니다. 목적지인 알베르게를 불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부터, 갑자기 제 몸과 다리가 전혀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약한 체력으로 남편을 따라오느라 쌓였던 피로에, 전날 남편의 몸살을 돌보느라 바짝 긴장했던 마음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제게도 독한 몸살이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목적지가 눈앞인데 더 이상 한 걸음도 떼기 힘들 만큼 몸이 부서질 것 같았습니다.
제가 길가에 멈춰 서서 괴로워하고 있자, 곁을 지나쳐 가던 외국인 순례자 친구들이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따뜻한 눈빛을 건네주었습니다.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더 힘내!"라며 저마다의 언어로 건네주는 용기의 한마디가 참으로 따뜻하게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타국에서 만난 이름 모를 친구들의 응원에 힘입어, 저는 정말 젖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가까스로 알베르게 문을 열고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거짓말처럼 그대로 뻗어 버렸습니다.
3. 다행스러운 연박 허락, 기적 같은 휴식의 시간
도저히 다음 날 다시 배낭을 메고 움직일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챙기며, 알베르게 호스피탈레로(자원봉사자)에게 다가가 혹시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무는 연박이 가능한지 물어보았습니다.
보통 순례길의 알베르게는 규칙상 1박만 허용되는 경우가 많아 마음을 졸였는데, 봉사자분은 제 몸 상태를 유심히 살피더니 선선히 자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저희 부부는 망설임 없이 이곳에서 이틀 동안 머무며 제 몸이 회복될 때까지 온전히 쉬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눈부신 유채꽃 풍경을 보며 감탄하며 걸어왔는데, 도착하자마자 앓아누워 연박을 신청하게 되다니 사람 일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바레테에서 남편이 아팠을 때 제가 곁을 지켰듯, 이번에는 남편의 따뜻한 간호를 받으며 조용히 약을 먹고 온전한 휴식을 취했습니다.
마치며: 서로를 교대로 채워주는 순례의 길
산토 도밍고에서의 뜻밖의 연박은, 순례길이 우리에게 '완급 조절'을 가르쳐주는 또 하나의 수업이었습니다. 남편이 아프면 내가 멈추고, 내가 아프면 남편이 가방을 들어주고 다독이며 쉬어가는 길.
화려한 유채꽃밭의 아름다움보다 더 빛났던 것은 길 위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의 응원과, 서로의 아픔을 교대로 채워주는 우리 부부의 단단해진 호흡이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산토 도밍고의 고즈넉한 마을을 둘러보며 몸을 완전히 회복한 뒤, 나바라와 리오하 지방을 지나 마침내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의 시작점인 '벨로라도(Belorado)'로 향하는 새로운 여정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길 위에서 단단해지는 저희의 이야기를 계속 지켜봐 주세요.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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