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18] 악명 높은 메세타 평원과 30km 땡볕 속 첫 부부싸움 (feat. 판초우의)

부르고스에서의 달콤했던 휴식과 맛있는 빠에야의 기억을 뒤로하고, 저희 부부는 다음 목적지인 작은 시골 마을 '온타나스(Hontanas)'를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그동안은 하루에 20km 안팎을 걸었지만, 이때는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오늘은 조금 더 걸어보자!" 라며 욕심을 내어 처음으로 30km가 넘는 장거리 코스를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저희는 몰랐습니다. 이 선택이 순례길 전체를 통틀어 가장 무모하고 끔찍했던 악몽의 시작이 될 줄은 말입니다.

그늘 하나 없이 끝없이 펼쳐진 메세타 평원의 황량한 흙길과 뜨거운 태양

1. 정보 부족이 부른 무모함, 끝없는 땡볕의 메세타 평원

저희가 걷기로 한 그 길이 바로 순례자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황량한 대평원, '메세타(Meseta) 지대'라는 사실을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막연히 거리만 보고 길을 나선 저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늘 하나, 쉴 곳 하나 없는 끝없는 황토색 벌판이었습니다.

머리 위로는 뜨거운 햇볕이 사정없이 쏟아지는데, 30km가 넘는 길 내내 나무 그늘은커녕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평선 끝까지 오직 황량한 대지만 펼쳐져 있어서, 만약 함께 걷는 다른 순례자들이 없었거나 노란 화살표 이정표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길을 완전히 잘못 들었구나' 하고 지레 겁을 먹었을 정도였습니다.

무지함에서 시작된 무리한 계획 때문에 온몸의 진이 빠지고 다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습니다.

2. 30km 벌판 위에서 터져 버린 부부의 첫 싸움

그렇게 그늘 하나 없는 땡볕 아래를 무작정 걸으며 피로와 더위가 극에 달하자, 결국 그동안 서로를 다독이던 저희 부부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습니다.

이 험난한 장거리 코스를 가자고 우겼던 사람이 바로 저였기에, 극도로 지친 남편의 원망과 불만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의 원망 섞인 말에 저 역시 서운함과 미안함이 복잡하게 얽히며, 순례길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길 한복판에서 크게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끔찍할 정도로 더운 햇빛 아래서 말없이 씩씩거리며 걷는 발걸음은 배낭의 무게보다 훨씬 더 무겁고 외롭게 느껴졌습니다.

서로를 의지하며 걸어왔던 길 위에서 무리한 욕심이 불러온 첫 위기였지만, 그 고독한 벌판을 함께 버텨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던 서글프고도 잊지 못할 순간이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 지대 위로 풍력발전기와 파란 하늘이 보이는 메세타 평원 풍경

3. 땡볕과 비바람을 모두 버티게 해준 신의 한 수, '판초우의'

이 황량하고 가혹한 벌판 한가운데서 저희 부부를 구원해 준 효자 아이템이 있었습니다. 바로 제가 한국에서 준비해 온 '돗자리 겸용 판초우의'였습니다.

보통 남편이 가져온 것처럼 일반적인 우의를 많이 챙겨오지만, 저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바닥에 넓게 펼쳐 깔고 앉을 수 있는 돗자리 겸용 판초우의를 꼼꼼하게 챙겨왔었습니다.

그늘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서 다리가 너무 아파 도저히 서 있을 수조차 없을 때, 저는 이 판초우의를 황토색 흙길 위에 넓게 펼쳐 놓았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그 위에 앉아 목을 축이고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습니다. 순례길 동안에는 3~4일 연속으로 거센 비가 쏟아지는 날이 많아 우의 본연의 방수 기능으로도 필수품이지만, 이처럼 그늘 없는 메세타 평원에서는 훌륭한 돗자리 겸 휴식처가 되어주었습니다.

순례길을 준비하시는 분들이라면 꼭 돗자리 기능이 겸용된 판초우의를 챙겨가시라고 강력하게 추천해 드립니다.

마치며: 흙 속에 숨어있던 안식처, 온타나스

판초우의에 의지해 서로의 서운함을 달래며 가까스로 걷다 보니, 신기하게도 평지처럼 보이던 대지 아래로 푹 꺼진 지형 속에 숨어있던 아늑한 마을 '온타나스'가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30km의 지옥 같은 땡볕과 싸움을 견뎌내고 마주한 마을의 온기는 지친 저희 부부를 따뜻하게 품어주었습니다.

무리한 계획으로 부부싸움까지 했던 하루였지만, 고단했던 몸을 누이고 나니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다시금 가슴 깊이 차올랐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온타나스를 떠나, 거대한 아치 유적과 언덕 위 고성이 반겨주는 메세타 평원의 아름다운 마을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로 향하는 여정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길 위에서 비로소 비워내는 법을 배워가는 저희의 이야기를 계속 지켜봐 주세요.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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