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17] 새벽 일출과 아타푸에르카, 그리고 부르고스의 맛

산 후안 데 오르테가를 뒤로하고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의 중심 대도시인 '부르고스(Burgos)'를 향해 떠나는 날이었습니다. 캄캄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길을 나섰는데, 지평선 저편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붉은 태양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유난히 해가 뜨는 모습이 멋졌던 그 아침,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일출을 바라보며 걷는 발걸음은 가슴 벅찬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순례자들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는 대표적인 거점 도시답게, 길 위에는 저마다의 빛을 따라 걷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꽤나 활기차게 이어졌습니다.

1. 아타푸에르카의 돌기둥: 수백만 년의 시간을 마주하다

부르고스로 향하는 드넓은 들판을 걷다 보면, 한가운데 여러 개의 돌기둥이 원형으로 웅장하게 서 있는 독특한 장소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낯선 이국땅의 현대미술 작품인가 싶었지만, 알고 보니 이곳은 인류의 아득한 역사와 인근 아타푸에르카(Atapuerca) 지역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뜻깊은 기념물이었습니다.

아타푸에르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흔적이 발견된 유적지 중 하나로, 무려 약 100만 년 전 인류의 화석과 석기가 발굴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거대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순례길은 그저 중세 시대의 종교적 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곳에서는 그보다 훨씬 아득한 인류의 시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습니다.

돌기둥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바람 소리만 들리는 들판에 서니, 수많은 선조가 거쳐 간 과거와 지금의 현재가 하나로 길게 이어지는 묵직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단순히 목적지를 향해 걷는 것을 넘어, 인간의 역사와 삶을 깊이 돌아보게 만드는 순간이었습니다.

2. 웅장한 대성당과 대도시 부르고스의 열기

경건했던 들판을 지나 마침내 부르고스 시내에 들어서자, 그동안 거쳐 왔던 아담한 시골 마을들과는 차원이 다른 활기찬 도시의 풍경이 저희를 반겨주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대도시의 열기와 북적임에 저희 부부의 마음도 절로 들떴고, 알베르게에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곳곳을 누비며 구경에 나섰습니다.

특히 마을의 소박했던 성당들과 달리,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선 부르고스 대성당의 웅장한 위용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하는 듯한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정교하게 조각된 중세 건축의 정수를 눈앞에서 바라보며, 이 거대한 성당을 세우기 위해 흘렸을 수많은 이들의 땀방울과 순례자들의 기도를 마음에 담았습니다. 고즈넉한 자연을 걷다가 마주한 대도시의 화려함은 순례길 여정에 또 다른 다채로운 색깔을 입혀주었습니다.

부르고스 식당에서 맛본 먹음직스러운 스페인 전통 빠에야 요리

3. 빠에야와 타파스, 팜플로나의 아쉬움을 달랜 먹거리 여행

부르고스에서의 진짜 즐거움은 바로 다채로운 스페인의 먹거리였습니다. 사실 순례길 초반에 거쳤던 대도시 팜플로나에서는 낯선 길에 적응하느라 지치고 피곤해서 제대로 도시의 맛과 멋을 즐기지 못하고 지나친 아쉬움이 크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부르고스에서만큼은 그 아쉬움을 원 없이 달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근사한 야외 식당 한곳을 골라 들어가 스페인의 대표 요리인 붉은 빠에야(Paella)와 한 입 거리 별미인 다양한 타파스(Tapas)를 주문했습니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을 곁들이며 노란 빠에야와 맛깔스러운 타파스를 나누어 먹는데, 그 맛과 행복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힘들게 참고 견디는 걷기가 아니라, 이 길을 '온전히 즐기는 길'로 바라보게 된 저희 부부의 변화를 느끼며 참으로 뿌듯하고 감사한 저녁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치며: 즐기는 순례자가 되어 다시 길 위로

새벽의 눈부신 일출로 시작해 수백만 년 전 인류의 시간을 건너, 활기찬 대도시 부르고스에서 맛본 빠에야의 풍미까지... 오늘 하루는 순례길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종합세트 같은 날이었습니다.

팜플로나에서의 아쉬움을 완벽하게 보상받으며, 저희 부부는 비로소 길을 몸으로 느끼고 눈과 입으로 즐기는 진짜 순례자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부르고스를 떠나, 나무 그늘 하나 없이 아득하게 펼쳐지는 순례길의 하이라이트이자 황량함 속의 고독을 선물하는 대평원 '메세타(Meseta) 지대'로 들어서는 여정을 들려드리겠습니다. 한층 더 단단해진 저희 부부의 이야기를 계속 함께해 주세요.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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