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1] 내가 800km 프랑스길을 걷게 된 이유: 버킷리스트와 삶의 덧없음 사이에서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상처와 질문을 안고 스페인으로 향합니다. 누군가는 퇴사 후 미래를 고민하러, 누군가는 연인과의 이별을 치유하러 걷는다고 합니다.

저에게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은 아주 오랜 시간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막연한 버킷리스트이자, 삶의 가장 어두운 터널 속에서 찾아낸 마지막 비상구였습니다.

오늘은 제가 왜 그 수많은 길 중 '프랑스길'을 선택해 800km를 걷게 되었는지, 그 시작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순례길을 망설이고 계신 분들께 작은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의 소망이 담긴 작은 돌탑과 산티아고 순례길을 안내하는 노란 화살표 비석

1. 마음속 깊이 묻어둔 오랜 버킷리스트의 시작

저는 어릴 적부터 유난히 걷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는 몸을 움직이고, 운동하고, 땀을 흘리는 활동적인 삶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이었는지 방송 다큐멘터리였는지는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이국적인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의 뜨거운 햇살 아래 끝없이 펼쳐진 흙길을 오직 내 두 발과 배낭 하나에 의지한 채 800km가 넘는 길을 걸어간다는 이야기.

그 단순하면서도 치열한 여정은 제 가슴속에 깊은 파동을 일으켰고, 그때부터 "언젠가 내 인생에서 한 번은 꼭 저 길 위에 서리라"는 막연하지만 단단한 버킷리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젊은 날에는 매일 쳇바퀴 돌듯 흘러가는 직장 생활에 치여 여유가 없었고, 결혼을 한 후에는 아이들을 키우고 가정을 돌보느라 제 개인의 꿈은 서서히 뒤로 밀려났습니다. 그렇게 순례길은 일상의 분주함 속에 자연스럽게 잊히는 듯했습니다.

2. 삶의 임계점, 그리고 찾아온 인생의 덧없음

정신없이 살아가면서도 문득문득 삶이 버겁고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이상하게도 잊은 줄 알았던 순례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아, 다 내려놓고 순례길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치밀어 오르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제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어머님께서 이른 나이에 생각지도 못하게 치매에 걸리신 것입니다.

점차 기억을 잃어가고 나중에는 자식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님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세상 그 어떤 고통보다 아팠습니다.

그리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시던 날, 저는 가슴이 뻥 뚫린 듯한 허무함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인생이란 참 덧없고 부질없구나.'

영원할 것 같았던 삶이 너무나 쉽게 허물어지는 것을 보며, 돈을 벌고 가정을 꾸리고 앞만 보고 달리던 모든 순간에 근본적인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삶의 허무함과 슬픔이 저를 짓누르던 그때, 어릴 적 품었던 순례길의 기억이 다시금 강하게 저를 이끌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내 삶의 의미를 다시 세우기 위해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마주하게 되는 프랑스길 피레네산맥의 웅장한 첫 풍경

3. 첫 순례길로 프랑스길을 선택한 이유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다양한 경로가 있습니다. 포르투갈길, 북쪽길, 은의 길 등 매력적인 코스가 많지만, 저는 망설임 없이 프랑스길(Camino Francés)을 선택했습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 가장 클래식하고 인프라가 잘 갖춰진 길: 프랑스길은 프랑스 남부 '생장피에드포르(Saint-Jean-Pied-de-Port)'에서 출발해 피레네산맥을 넘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이어지는 약 800km의 대표적인 순례길입니다.

    첫 순례자였던 저는 숙박시설(알베르게)과 이정표가 잘 갖춰져 있고, 길을 잃을 걱정을 덜 수 있는 프랑스길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 전 세계 순례자들과의 연대: 프랑스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순례자가 찾는 코스입니다. 혼자 걷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서로 위로하고 응원하며 걸을 수 있다는 점도 큰 매력이었습니다.

  • 인생의 축소판 같은 다채로운 풍경: 피레네의 험난한 고개부터 메세타의 끝없는 지평선, 갈리시아의 푸른 숲까지, 인간의 희로애락을 닮은 풍경을 온몸으로 마주하기에 프랑스길만 한 곳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며: 길을 나서는 예비 순례자들에게

치매로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을 그리워하며, 그리고 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채워가야 할지 질문을 던지며 저는 그렇게 프랑스길 위에 섰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에서도 "내가 갈 수 있을까?", "지금 가도 괜찮을까?" 고민하며 망설이고 계신 분이 있다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삶의 무게가 무거워질 때,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렸다고 느낄 때가 바로 떠나야 할 때입니다.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음 포스팅부터는 프랑스길을 가기 위해 제가 어떻게 짐을 꾸렸는지, 어떤 체력 준비를 했는지 실제적인 가이드와 함께 본격적인 일자별 순례기를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Buen Camino! (좋은 길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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