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4] 파리에서의 3박 4일, 그리고 마침내 도착해 누운 생장의 첫 알베르게
프랑스길의 진짜 시작점인 '생장피에드포르(Saint-Jean-Pied-de-Port)'로 가는 길은 그 자체로 설레는 여행이었습니다.
저는 순례길을 처음부터 너무 비장하고 무거운 '고행의 길'로만 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마음 한구석에 고이 품어왔던 꿈이자 버킷리스트였기에, 이 여정의 모든 순간을 온전히 즐거운 여행의 일부로 만들고 싶었지요.
그래서 저는 곧장 생장으로 가는 대신, 프랑스 파리에서 3박 4일 동안 달콤한 여행을 먼저 즐긴 후에 순례길에 오르기로 결심했습니다.
1. 파리에서의 3박 4일: 낭만 속에서 잠시 잊었던 현실감
산티아고를 걷기 전, 파리에서의 3박 4일은 그야말로 꿈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에펠탑을 바라보고, 골목길의 노천카페에 앉아 크루아상과 커피를 마시며 파리의 낭만을 온몸으로 만끽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저는 제 앞에 어떤 험난한 피레네산맥이 기다리고 있는지, 매일 20km씩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어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버킷리스트를 실현하러 왔다는 행복감과 설렘에 취해, 현실 감각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낸 채 파리의 구석구석을 누볐습니다.
어쩌면 그 대책 없는 낙천성이야말로 오랜 두려움을 깨고 스페인까지 오게 만든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파리에서의 즐거웠던 기억은 순례길 초반, 몸이 고되고 힘들 때마다 꺼내어 볼 수 있는 따뜻한 비상식량이 되어주었습니다.
2. 파리에서 바욘을 거쳐, 기차를 타고 생장으로 향하는 길
파리에서의 달콤했던 3박 4일 일정을 아쉽게 뒤로하고, 드디어 진짜 순례길의 출발점으로 가기 위한 여정에 올랐습니다.
우선 파리 몽파르나스역에서 초고속열차인 TGV를 타고 프랑스 남서부의 아름다운 관문 도시인 '바욘(Bayonne)'으로 향했습니다.
바욘에 도착한 뒤, 다시 생장피에드포르행 완행열차로 갈아타야 했는데 이 기차를 타는 순간부터 몽환적이던 여행의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습니다.
덜컹거리며 숲길을 달리는 작은 기차 안은 저처럼 커다란 배낭을 발치에 두고 눈에 긴장과 설렘을 가득 담은 전 세계의 예비 순례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기차 안의 묘한 공기 속에서 비로소 '나도 이제 저들과 함께 800km를 걷게 되는구나' 하는 실감이 머리를 강하게 스쳤습니다.
창밖으로 펼쳐진 그림 같은 남프랑스의 초록빛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내일 당장 마주해야 할 피레네산맥 걱정과 내 신발이 무사히 나를 데려다줄지에 대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아도, 배낭에 달린 노란 조개를 보며 조용히 미소 짓던 그 열차 안의 서늘하면서도 뜨겁던 공기는 아직도 제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한 첫 장면으로 남아있습니다.
3. 마침내 도착한 첫 알베르게, 현실로 다가온 순례자의 밤
마침내 남프랑스의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성곽 마을, 생장피에드포르에 도착했습니다. 기차에서 내려 순례자 사무실에 들러 노란 조개껍데기를 배낭에 달고,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시알(Credencial)'을 발급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약해 둔 제 인생의 첫 '알베르게(순례자 숙소)'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삐걱거리는 2층 침대들이 늘어선 방에 배낭을 내려놓고 침대 한 칸에 누웠을 때, 파리에서의 낭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비로소 아주 낯설고 생생한 현실이 밀려왔습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낯선 외국어들, 좁은 공간을 나누어 쓰는 고단한 공기, 그리고 내일 당장 넘어야 할 피레네산맥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내가 정말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침대보를 꼭 쥐었던 그날 밤의 묘한 공기는, 제가 진짜 순례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엄숙한 입회의 순간이었습니다.
마치며: 두근거리는 첫 밤을 보내고
파리의 낭만적인 여행자로 시작해, 바욘을 거쳐 생장의 좁은 침대에 누운 순례자가 되기까지의 하루는 참 길고도 오묘했습니다.
현실 감각 없이 둥둥 떠다니던 마음은 알베르게의 딱딱한 침대 위에서 비로소 땅으로 내려앉았지요. 비록 긴장으로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지만,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드디어 꿈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는 벅찬 감격이 차올랐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드디어 날이 밝고 마주하게 된 프랑스길 최고의 난코스, 피레네산맥을 넘으며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던 그 첫날의 생생한 고군분투기로 찾아오겠습니다.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