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5] 피레네의 비바람을 뚫고 마주한 론세스바예스: 설렘과 긴장의 첫걸음
생장의 첫 알베르게에서 묘한 긴장감 속에 첫 밤을 보내고 마침내 순례길의 첫 아침이 밝았습니다. 숙소에서 간단하게 제공해 주는 빵과 커피로 가볍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섰습니다.
신발 끈을 단단히 묶고 배낭을 멘 채 마을 어귀를 나서는데, 온몸에 닭살이 돋는 설레는 기분이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내가 정말 이 길 위에 서 있구나' 하는 감격은 지금 떠올려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제 인생의 본격적인 800km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1. 아쉬운 우회 도로 선택, 그리고 나를 지켜준 동키 서비스
첫날의 원래 목표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이루는 험난한 피레네산맥을 직진으로 넘어가는 '나폴레옹 코스'였습니다.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국경선을 제 두 발로 직접 밟고 넘어가고 싶다는 로망이 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날 산 위의 기상 악화로 인해 안전을 위해 우회 도로(발카를로스 코스)를 택해야만 했습니다.
국경을 밟지 못해 못내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순례길의 첫 교훈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우회 도로 역시 만만한 산길이 아니었기에, 저는 혹시 모를 체력 저하와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과감하게 '동키 서비스(배낭 배송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출발 전 한국에서 걷기 연습을 열심히 했다고는 하지만, 첫날부터 무리해서 무릎을 다치면 남은 여정 전체를 망칠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숙소에 배낭을 맡겨두면 다음 목적지 알베르게까지 가방을 안전하게 배달해 주는 이 서비스 덕분에, 저는 가벼운 몸으로 첫날의 산길을 안전하게 오를 수 있었습니다.
50대 순례자라면 첫날만큼은 체력 안배를 위해 동키 서비스를 활용하시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천해 드립니다.
2. 카미노 닌자(Camino Ninja) 어플과 피레네의 무서운 비바람
길을 나설 때의 날씨는 정말 환상적일 정도로 맑고 좋았습니다. 파란 하늘을 보며 사방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대자연을 감상하며 걷는 매 순간이 감동이었습니다.
낯선 길이었지만 순례자들의 필수 어플인 '카미노 닌자(Camino Ninja)'를 켜고 길 안내를 받으며 걸으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어 마음이 한결 편안했습니다.
내 위치와 남은 거리, 고도 차이를 한눈에 보여주는 고마운 나침반 같은 어플이었습니다. 그러나 산의 날씨는 정말 변화무쌍하고 어마어마했습니다.
맑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첫날의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에는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웅장한 대자연의 날씨 변화 앞에서 얼마나 놀라고 가슴이 졸였는지 모릅니다. 우회 도로를 택하고 배낭을 동키로 보냈기에 망정이지, 만약 무거운 짐을 메고 나폴레옹 코스를 올랐다면 정말 큰일이 났겠구나 싶어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자연의 위력 앞에서 겸손함을 배우며 마침내 저 멀리 론세스바예스의 거대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3. 거대한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그리고 말문이 막혔던 저녁 식사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론세스바예스 공영 알베르게는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엄청나게 커서 깜짝 놀랐습니다.
수백 명의 순례자를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현대식 대형 숙소에 발을 들이니, 비로소 안도감이 찾아왔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 도착하니 유독 한국인 순례자들이 많이 보였다는 점입니다. 타지에서 만난 고국 분들의 모습이 참 반갑고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따뜻한 물로 시원하게 샤워를 마치고, 소정의 금액을 지불하면 이용할 수 있는 순례자 메뉴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커다란 테이블에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외국인 순례자들과 둥글게 둘러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귀로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대충 들리기는 하는데, 막상 제 입에서는 영어 한마디가 쉽게 떨어지지 않아 마음속으로 무척 속상하고 슬픈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된 첫날의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과 함께, 테이블에 차려진 따뜻한 음식과 진한 스페인 와인을 곁들이니 음식의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비록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 눈을 맞추며 미소 짓는 것만으로도 묘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와인 한 잔에 몸의 피로를 녹여내며, 내일의 새로운 길을 위해 포근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마치며: 낯선 언어 속에서도 피어난 안도감
거친 비바람을 뚫고 마주한 론세스바예스의 밤은 참 오묘했습니다. 비록 외국인 순례자들과 유창하게 대화를 나누지 못해 마음 한구석에 씁쓸한 슬픔이 남기도 했지만, 함께 와인 잔을 부딪치며 서로의 고된 하루를 위로하는 마음만큼은 언어를 넘어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첫날의 혹독한 날씨와 긴장감을 무사히 이겨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제 자신에게 작은 박수를 보내고 싶은 밤이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론세스바예스를 떠나 잔잔한 숲길과 가파른 자갈길을 내려가며 마주한 이야기, 그리고 아름다운 돌다리가 반겨주는 마을 '주비리(Zubiri)'로 향하는 여정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길 위에서 만난 또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