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19]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에서 만난 십자가와 고향의 맛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는 말이 있지요. 전날 메세타 평원의 30km 땡볕 아래서 크게 다투었던 저희 부부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음 날 아침이 오자 서로를 챙기며 조용히 신발끈을 묶고 길을 나섰습니다.
전날 겪었던 가혹한 더위의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시 메세타의 무더위와 싸워야 한다는 두려움이 가득했기에, 이번 일정은 무리하지 않고 거대한 고딕 양식 아치가 우뚝 서 있는 아름다운 마을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까지만 가기로 정했습니다.
1. 화해의 걸음과 메세타 언덕 위 십자가의 울림
스페인 메세타 지대의 날씨는 날이 갈수록 무더움과 황량함을 더해갔습니다. 하지만 뜨거운 대지 위를 걷다 보면 마음을 절로 숙연하게 만드는 풍경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황토색 언덕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길가 중간중간 세워져 있는 나무 십자가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은 순례자들이 저마다 가슴속에 품고 온 소원이나 소중한 사람을 향한 마음, 또는 삶에서 지고 온 마음의 짐을 내려놓기 위해 돌과 꽃, 조그만 끈 등을 올려둔 뜻깊은 장소입니다.
전날 부부싸움으로 무거웠던 마음을 털어내고 신발끈을 묶었던 저희 부부 역시, 언덕 위 십자가를 바라보며 지난 걸음을 돌아보고 남은 길을 무사히 걸어갈 수 있기를 함께 마음 모아 기도했습니다.
길 위의 십자가는 서로에게 서운했던 감정을 지우고 다시 나란히 걷게 해주는 또 하나의 은혜였습니다.
2. 카스트로헤리스와 한국인 알베르게에서 맛본 소울푸드
거대한 고딕 양식 아치가 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산 안톤 수도원 유적을 지나 마침내 카스트로헤리스에 도착했습니다. 이동 거리가 짧았던 덕분에 생각보다 일찍 마을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이곳을 오늘의 목적지로 정한 가장 큰 이유는, 한국분께서 직접 운영하시는 알베르게와 카페가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숙소를 잡고 여유가 생긴 저희는 카페 오픈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 와중에 다른 한국인 순례자들도 소문을 듣고 찾아왔지만, 일정상 더 멀리 이동해야 했던 분들은 카페가 열릴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아쉽게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주문한 한국의 대표 소울푸드 라면과 김밥, 그리고 가슴속까지 뻥 뚫어주는 시원한 스페인 생맥주 한 잔을 손에 쥐었습니다.
먼 이국땅 메세타 평원 한가운데서 맛보는 라면과 김밥의 이국적인 조화는 그동안 쌓였던 모든 피로와 더위를 단번에 날려 보내기에 충분했습니다.
3. 낭만 너머의 현실, 그리고 순례길에서 만난 리스펙트
음식을 맛있게 비우고 가게 문을 연 알베르게 사장님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습니다. 사장님은 한국인 여성분이었는데, 순례길을 직접 걸으면서 이 길과 스페인이 너무 좋아 이곳에 정착해 알베르게를 열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막상 겉에서 보는 낭만과 달리 실제 운영해 보니 마음처럼 쉽지 않고 참 고되다"며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저 역시 순례길을 걷는 내내 '아, 나도 여기서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수없이 하곤 했었기에, 사장님의 이야기는 막연한 낭만을 넘어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 귀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에 들렀던 어느 카페에서는 한국 여성분이 외국인 남편과 함께 웃으며 재미있게 운영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이 사장님은 연고 없는 타국에서 혼자 힘으로 이 길을 지키며 순례자들에게 따뜻한 쉼터를 제공해 주고 계셨습니다.
비록 힘겨워 보이는 순간도 있었지만 자신의 삶을 당차게 일궈나가는 그분의 도전과 열정에 가슴 깊은 존경(Respect)을 표하게 되었습니다.
마치며: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다시 나아가는 길
언덕 위 십자가 앞에 내려놓은 마음의 짐과, 먼 타국 카스트로헤리스에서 만난 따뜻한 고향의 맛, 그리고 정직하게 삶을 살아가시는 한국인 사장님과의 대화까지... 짧은 거리였지만 오늘 하루는 그 어느 날보다 가슴속 깊은 울림과 온기가 듬뿍 채워진 날이었습니다.
무더운 땡볕과 피로 속에서도 길은 늘 예상치 못한 귀한 인연과 안식처를 선물해 준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카스트로헤리스를 뒤로하고, 메세타 평원의 고요함을 간직한 운하 마을 '프로미스타(Frómista)'로 향하는 여정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저희 부부의 스페인 순례길 이야기에 계속 함께해 주세요.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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