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7] 팜플로나(Pamplona)의 씁쓸함과 눈물의 한국 라면

주비리에서의 고단한 밤을 보내고 마주한 세 번째 목적지는 헤밍웨이가 사랑한 열정의 도시, '팜플로나(Pamplona)'였습니다. 순례길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마주하는 대도시였기에 출발 전에는 기대가 참 컸습니다.

보통 이런 멋진 대도시에 오면 유서 깊은 성당도 구경하고, 활기찬 광장에 앉아 사람 구경도 하며 맛있는 스페인 요리를 즐기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첫 대도시 방문은 낭만적인 관광 대신, 지독한 피로감과 아쉬움으로 가득 찬 하루가 되고 말았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 중 마주한 팜플로나의 고풍스러운 옛 성문 입구

1. 대도시의 활기 속, 숙소에서 뻗어버린 50대의 현실 체력

첫날의 기상 악화와 둘째 날 비에 젖은 악명 높은 자갈길 내리막을 내려오며 온몸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탓이었습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다리에 과도하게 힘을 주며 걸었더니, 팜플로나에 입성하자마자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지며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알베르게에 도착해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저는 침대에 그대로 뻗어버렸습니다. 창밖으로는 대도시 특유의 활기찬 소리가 들려왔고, 특히 체력이 넘치는 외국인 순례자들은 숙소에 오자마자 짐만 툭 던져두고 옷을 갈아입은 채 도시를 즐기러 바쁘게 나가 바깥은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침대에 누워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언제쯤 저렇게 지치지 않고 길을 즐길 수 있을까?' 하는 깊은 부러움과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 순례길 초반의 현실적인 체력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며, 야속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저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낯선 스페인어 장벽과 지하 식당에서 마주한 먹통 번역기

겨우 정신을 차리고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밖으로 나섰습니다. 하지만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기본적으로 영어를 쓰지 않고 스페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것부터가 큰 장벽이었습니다. 처음 방문한 식당에는 제대로 된 영어 메뉴판이 전혀 없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스마트폰 번역기 어플이라도 켜서 메뉴를 읽어보려 했지만, 하필 식당이 지하에 위치해 있어 데이터가 터지지 않아 어플마저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고 메뉴는 읽을 수 없는 답답한 상황 속에서 결국 아무것도 시키지 못하고 쫓기듯 식당을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리라도 덜 아팠다면 다른 식당을 천천히 찾아보았겠지만, 한 걸음 떼기도 힘든 통증 때문에 더 이상 거리를 헤맬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첫 대도시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낯선 언어의 장벽은 생각보다 더 차갑고 막막하게 다가왔습니다.

3. 아쉬움 끝에 만난 위안, 눈물 젖은 한국 라면 한 그릇

골목 근처를 헤매다 발견한 아시아 마켓이 그날 저녁 저희의 구원투수가 되어주었습니다. 머나먼 스페인의 대도시 한복판에서 익숙한 한국 라면을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멋진 레스토랑에서의 스페인 만찬 대신, 알베르게 주방으로 돌아와 냄비에 보글보글 라면을 끓여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상상했던 낭만적인 대도시의 저녁 식사는 아니었지만, 매콤하고 익숙한 고국의 라면 국물이 입안에 퍼지는 순간 묘한 위로가 찾아왔습니다.

타지에서 겪은 서러움과 피로가 뜨끈한 국물 한 모금에 조금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대도시까지 와서 라면을 끓여 먹어야 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기도 했지만, 타지에서 익숙한 한국 라면을 먹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언제쯤 이 길을 온전히 즐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슬며시 들기도 했지만, 따뜻하게 배를 채우고 나니 내일은 또 내일의 길이 열릴 거라는 작은 용기가 생겼습니다.

마치며: 조금 늦어도 괜찮은 나만의 적응기

화려한 팜플로나의 밤은 깊어갔고, 창밖의 활기찬 소리를 자장가 삼아 다시 올지 모를 대도시의 첫 밤을 보냈습니다.

비록 남들처럼 멋지게 도시를 즐기지는 못했고 부러움 가득한 아쉬움만 남은 하루였지만, 이 또한 제가 순례길에 적응해 나가는 소중한 과정 중 하나일 것이라 믿기로 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아쉬웠던 팜플로나를 뒤로하고, 순례길의 상징과도 같은 철제 순례자 동상이 서 있는 용서의 언덕, '페르돈 고개(Alto de Perdón)'를 향해 가는 숨 가쁜 여정을 들려드리겠습니다. 한 단계 더 성장해 가는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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