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21] 칠흑 같은 새벽길의 헤드랜턴과 추억을 담는 순례자 여권(크레덴시알)
프로미스타의 정겨운 마을 분위기와 남편을 위해 열었던 따뜻한 생일 파티의 여운을 뒤로하고, 저희 부부는 다음 목적지인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ón de los Condes)'를 향해 일찍 길을 나섰습니다.
이른 아침 길을 나설 때마다 마주하는 서늘하고 적막한 새벽 공기는 늘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주곤 했지만, 이날 맞이한 새벽길은 유독 다른 날보다 사방이 캄캄하고 칠흑처럼 어두웠습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길을 걸으며 느꼈던 아찔한 긴장감부터, 조용한 수녀원 알베르게에서 경험했던 포근한 안식, 그리고 비에 젖을까 고이 품고 다녔던 순례자 여권(크레덴시알)에 담긴 소중한 추억들까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시작해 따스한 온기와 감동으로 이어졌던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서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1. 칠흑 같은 새벽길, 스마트폰 플래시와 헤드랜턴의 소중함
사실 저희 부부는 한국에서 순례길을 떠나기 전, 어두운 새벽길 보행에 쓰려고 전용 헤드랜턴을 야심 차게 준비해 왔었습니다. 하지만 여정 중간에 그만 랜턴을 어디선가 잃어버리고 말았고, 결국 사방이 캄캄한 새벽마다 스마트폰 플래시 불빛 하나에 의존한 채 겨우 발밑을 비추며 걸어야 했습니다.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계속 들고 불빛을 비추며 걷다 보니 등산 스틱을 제대로 쥐지 못하거나 두 손을 자유롭게 쓰지 못해 생각보다 신체적인 불편함이 아주 컸습니다. 스페인의 새벽길은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도 인가나 가로등이 전혀 없어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이 몰아칩니다.
자칫 발밑을 제대로 밝히지 못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발목을 삐끗할 뻔한 아찔한 순간을 몇 번 겪으면서, 새벽 출발이 많은 순례길에서는 두 손을 자유롭게 해주는 '헤드랜턴'이 단순한 장비가 아닌 필수 안전용품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만약 순례길을 준비하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짐이 되더라도 반드시 몸에 잘 착용되는 성능 좋은 헤드랜턴을 꼭 챙겨가시라고 강력하게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2. 조용하고 아늑했던 수녀원 알베르게에서의 포근한 하룻밤
어둠을 뚫고 무사히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 도착한 저희 부부는 이번에 조금 특별한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습니다. 바로 수녀원에서 직접 운영하는 공영 알베르게였습니다.
여태껏 머물렀던 일반적인 사설 알베르게나 대형 숙소와는 사뭇 다르게, 입구에서부터 고즈넉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지친 저희 부부를 맞아주었습니다.
수녀원이라는 정갈한 공간이 주는 특유의 평온함 덕분인지, 숙소 주변도 굉장히 조용하고 아늑하여 그동안 메세타 지대를 걸으며 쌓였던 신체적 피로를 한 겹 털어내기에 더없이 좋은 안식처가 되어주었습니다.
이곳에 머물며 순례자 여권만 제시하면 저렴한 비용으로 내 몸을 편안하게 누일 수 있는 침대와 따뜻한 온수가 나오는 샤워 시설은 물론, 음식을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주방까지 이용할 수 있어 참 감사했습니다.
특히 규모가 조금 큰 알베르게에 가면 먼 길을 걸으며 땀과 흙으로 더러워진 옷가지를 깨끗하게 세탁하고 건조할 수 있는 세탁기와 건조기까지 잘 구비되어 있어서, 고된 여정을 이어가는 순례자들에게는 정말 오아시스 같은 고마운 공간이었습니다. 이렇게 포근한 쉼터가 있기에 매일의 고단함을 잊고 다시 걸어 나갈 힘을 얻게 됩니다.
3. 추억을 차곡차곡 채워주는 소중한 순례자 여권(크레덴시알)
순례길을 걷는 동안 그 어떤 귀중품보다 애지중지하며 챙겨야 하는 보물 1호는 단연 '순례자 여권(크레덴시알)'입니다. 이 수첩 형태의 여권은 단순히 알베르게에 들어설 때 순례자 신분을 확인받는 용도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길을 걷다 만나는 작고 아기자기한 시골 마을의 카페나 고즈넉한 성당에 들르면, 정겨운 주인분들이 도장(Sello)을 가져다주며 위치를 알려주고 마음껏 찍으라고 따뜻한 인사를 건네곤 합니다.
빈칸마다 각양각색의 문양이 담긴 도장과 날짜가 차곡차곡 채워져 가는 과정은, 고된 여정 속에서 느껴지는 순례길만의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매력이자 즐거움이었습니다.
혹시라도 걷다가 쏟아지는 비에 젖을까, 혹여나 가방 속에서 찢어질까 싶어 비닐에 꽁꽁 싸매어 품에 안고 다녔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먼 훗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최종 도착하여 마지막 도장을 번쩍 찍던 그 순간의 벅찬 감동은, 지금 떠올려도 온몸에 전율이 흐르고 소름이 끼칠 만큼 강렬한 인생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가끔 이 수첩을 펼쳐 도장과 날짜를 보고 있으면, 그날의 날씨와 바람 소리, 길 위의 풍경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라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가장 소중한 보물입니다.
마치며: 도장 속에 새겨진 걸음을 뒤로하고
스마트폰 작은 불빛 하나에 의존해 조심스레 헤쳐 나온 칠흑 같은 새벽길의 긴장감, 수녀원 알베르게가 안겨준 조용한 평온함, 그리고 순례자 여권 수첩 속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알록달록한 도장과 소중한 추억들까지...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서 보내온 하루는 순례길이 전해주는 단순하지만 가슴 깊은 삶의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 주었습니다.
여권에 새겨진 지나온 날들의 도장과 날짜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치고 힘들었던 순간마저도 모두 아름다운 보석으로 변해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길 위에서 얻은 따뜻한 위로와 힘을 안고, 저희 부부는 다시 가벼워진 마음과 발걸음으로 배낭을 짊어지고 다음 여정을 향해 길을 나섭니다.
다음 글에서는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를 떠나, 메세타 평원 속 템플 기사단의 전설과 고즈넉함이 숨 쉬는 작은 마을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Terradillos de los Templarios)'로 향하는 고독하지만 아름다운 여정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저희 부부의 순례길 이야기에 늘 따뜻한 관심과 응원으로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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