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12] 나바레테(Navarrete): 남편의 첫 몸살과 12km의 짧은 하루
로그로뇨의 따뜻했던 기부제 알베르게를 뒤로하고 나선 길, 이번 목적지는 평소 걷던 거리의 절반도 안 되는 고작 12km 떨어진 작은 마을 '나바레테(Navarrete)'였습니다.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 가장 짧은 코스를 선택한 데에는 남모를 사연이 있었습니다. 늘 제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던 남편이 걷기 시작한 지 열흘 만에 처음으로 심한 몸살이 난 것입니다.
1. 든든했던 동행자의 무게, 그리고 찾아온 몸살
그동안 남편은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꽤나 긴장하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낯선 스페인 땅에서 본인 몸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텐데, 체력이 약한 아내인 저까지 신경 쓰며 걸어야 했으니 신경이 온통 곤두서 있었겠지요.
그러다 이틀 전 주비리에서 만난 청년들과 반갑게 어울리며 마셨던 맥주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긴장이 순간적으로 툭 풀리면서 그동안 누적된 피로가 몸살로 한꺼번에 터져버린 듯했습니다.
몸 상태가 최악이었음에도 이미 예약을 완료해 둔 로그로뇨까지는 가야 했기에, 남편은 정말 이를 악물고 버티며 걸어왔던 것입니다.
로그로뇨 숙소에 도착한 그날 저녁, 도저히 무리해서 걸을 수 없는 남편의 상태를 보고 저희는 다음 날만큼은 무조건 짧게 걷기로 합의했습니다. 매일 저녁 다음 행선지를 미리 예약해 두는 루틴 덕분에, 무리하지 않고 남편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 딱 12km 거리인 나바레테까지만 예약해 둘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길을 나섰을 때, 비록 몸은 아프고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다행히 길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리오하 지방의 경이로운 풍경이 지친 저희 부부에게 큰 위안을 건네주었으며, 맑은 하늘 아래 투명하게 비친 강가와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서글픈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습니다.
항상 앞장서서 저를 이끌어주던 남편이 기운 없이 걷는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참 짠했지만,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기대어 저희는 서로를 다독이며 천천히 걸었습니다.
2. 너무 일찍 도착한 마을, 낯설지 않은 전단지 속 식당
거리가 워낙 짧다 보니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주 일찍 나바레테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한 탓에 저희가 예약해 둔 알베르게는 아직 문을 열지 않고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아픈 남편을 데리고 길바닥에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 난감해하던 차에, 오면서 길거리에서 행인에게 받았던 전단지 한 장이 생각났습니다.
외국에서도 한국처럼 전단지를 나눠주며 식당 호객행위를 한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고 친숙하게 다가왔습니다. 저희는 전단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 그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큰 기대 없이 들어간 곳이었지만 다행히 음식 맛도 나쁘지 않고 깔끔해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낯선 이국땅의 골목에서 만난 소박한 전단지 한 장 덕분에 아픈 남편을 데리고 편안하게 앉아 배를 채우며 알베르게가 오픈하기를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3. 한국 비상약과 다시 일어설 용기
알베르게 문이 열리자마자 체크인을 하고 남편을 침대에 눕혔습니다. 남편은 끙끙 앓으며 힘들어했고, 저는 한국에서 든든하게 챙겨온 비상약을 꺼내 먹였습니다.
멀리 타국에서 아프면 서럽다는데, 주방에서 따뜻한 물을 떠다 주며 약을 챙겨주는 동안 제발 빨리 낫기만을 간절히 바랐습니다.
정성껏 챙겨온 한국 비상약을 다 털어 먹고 한참을 땀 흘리며 푹 자고 나더니, 참 다행스럽게도 남편의 몸살은 오래가지 않고 씻은 듯이 가라앉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언제 아팠냐는 듯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일어난 남편을 보며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습니다. 늘 받기만 했던 남편의 배려를 이번 기회에 조금이나마 갚아준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몸을 완벽하게 추스른 저희 부부는 다시 활기찬 에너지를 얻어 다음 목적지인 '나헤라(Nájera)'를 향해 씩씩하게 걸어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마치며: 서로의 속도를 맞춰가는 부부의 길
나바레테에서의 짧았던 하루는 저희 부부에게 순례길의 또 다른 의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한 사람이 지치면 다른 한 사람이 멈춰 서서 기다려주고 돌봐주는 것, 그렇게 서로의 컨디션과 속도를 맞춰가는 것이야말로 부부가 함께 걷는 순례길의 진짜 묘미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몸살을 훌훌 털어버린 남편과 함께 붉은 암벽과 넓은 벌판이 매력적인 역사적인 도시 '나헤라(Nájera)'로 향하는 다이내믹한 여정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위기를 겪으며 한층 더 단단해진 저희 부부의 다음 이야기도 기대해 주세요.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