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로뇨에서 나바레테: 남편의 몸살 위기와 골목길 전단지 식당

남편이 몸살로 많이 지친 다음 날, 저희는 무리하지 않고 로그로뇨에서 나바레테까지 약 12km만 걷기로 했습니다. 아픈 사람과 함께 걷기에는 부담이 크지 않은 거리였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나바레테에 도착했는데, 막상 마을에 들어서니 생각했던 것보다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중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골목을 걸었고, 길에서 우연히 받은 전단지 한 장 덕분에 그날의 시간도 조금 특별해졌습니다.

나바레테 마을의 중세 건축물, 이글레시아 데 라 아순시온 성당 외부 전경

중세마을, 골목 하나에도 역사가 쌓여 있다

나바레테는 남편의 몸살 때문에 거리를 줄여 급하게 정한 곳이라, 그저 잠시 하룻밤 쉬어가는 작은 마을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서 보니 현대 도시와는 확연히 다른 옛 분위기가 물씬 났습니다. 언덕길을 따라 이어지는 좁은 돌길 골목과 곳곳에 가문 문장이 새겨진 낡은 석조 저택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골목을 걷다 보니 건물 외벽이나 상점 곳곳에 점토로 빚은 질그릇과 타일 장식들이 자주 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나바레테는 카미노 길목에서도 유서 깊은 '도자기의 마을'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붉은 점토로 빚어낸 소박한 도기들이 골목 곳곳을 장식하고 있어 걷는 재미를 더해주었습니다.

마을 중심 언덕에 우뚝 솟은 이글레시아 데 라 아순시온 성당(Iglesia de la Asunción) 안으로 들어가자, 제단 정면을 가득 채운 황금빛 대형 제단화가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두운 성당 내부에 은은한 조명이 비치자 수많은 성인 조각이 새겨진 거대한 황금 제단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작은 시골 마을 성당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웅장하고 정교했습니다.

마을 중심 광장 주변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약국과 작은 식료품점, 카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조용히 숨을 고르기에도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낡은 골목과 큰 성당을 직접 둘러보고 나니, 단순히 하루 묵고 지나가기에는 아까울 만큼 오랜 시간을 간직한 마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살 위기, 12km짜리 결단

사실 그날 나바레테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작은 기적이었습니다. 남편은 이틀 전 로스 아르코스에서 만난 청년들과 맥주를 몇 잔 나눈 뒤, 그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겹치면서 몸살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로그로뇨까지 걸었으니 체력은 이미 많이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은 욕심을 버리고 나바레테까지 약 12km만 걷기로 했습니다. 알베르게도 미리 예약해 두었습니다. 남편은 한국에서 챙겨온 비상약을 먹고 충분히 쉬었고, 다행히 다음 날 아침에는 몸 상태가 한결 나아졌습니다.

나바레테에는 산 후안 데 아크레 병원(Hospital de San Juan de Acre)의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1185년에 세워진 이 병원은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돌보던 곳으로, 지금은 일부 유적만 남아 있습니다. 특히 옛 병원에 딸린 교회의 로마네스크 양식 출입구는 1887년 마을 공동묘지로 옮겨져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수백 년 전 지쳐서 이 문을 통과했을 순례자들을 떠올리니, 그날 아픈 남편을 데리고 이 마을에 들어온 저희 모습이 그 순례자들과 살짝 겹쳐 보였습니다. 걷는 길은 달랐지만, 지친 몸으로 산티아고를 향한다는 마음만큼은 어쩌면 비슷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카미노를 걸으며 제가 직접 느낀 것은 계획을 지키는 것보다 그날의 몸 상태에 맞춰 거리를 조절하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세운 일정만 고집하면 하루의 무리가 이후 구간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바레테행 12km는 단순히 하루를 짧게 걷는 선택이 아니라, 남은 길을 무리 없이 이어가기 위한 조정이었습니다.

카미노를 준비하는 분들이라면 다음 네 가지는 미리 생각해 두면 좋습니다.

  1. 다음 날 구간과 알베르게를 미리 확인하기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예정된 목적지까지 무리해서 갈 필요가 없습니다. 거리와 알베르게 위치를 미리 알아두면 당일 상황에 따라 일정을 조정하기가 수월합니다.

  2. 목적지의 편의시설도 함께 확인하기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날이라면 거리뿐 아니라 약국, 식당, 마트 같은 기본적인 편의시설이 있는지도 확인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3. 평소 복용하던 약과 비상약 준비하기
    스페인에서도 약국을 이용할 수 있지만, 평소 복용하던 약이나 익숙한 비상약은 출국 전에 준비해 가는 편이 편합니다.

  4. 동행자와 컨디션을 솔직하게 공유하기
    함께 걷는 사람이 있다면 아픈 것을 참기보다 현재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걷는 속도와 거리, 휴식 시간을 함께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날의 12km는 처음부터 계획했던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짧은 거리를 선택했기 때문에 다음 날 이후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카미노에서는 때로 더 많이 걷는 것보다, 멈추고 줄이는 용기가 더 필요했습니다.

전단지 식당, 기다림을 식사로 바꾸다

거리가 짧았던 만큼 저희는 나바레테에 예상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이른 시간엔 예약해 둔 알베르게가 아직 체크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아픈 남편을 데리고 길바닥에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카페라도 찾자니 앉아서 얼마나 버텨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때 문득 생각난 게 오면서 받은 전단지였습니다. 카미노를 걷다 보면 마을 입구쯤에서 식당이나 숙소 홍보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들을 가끔 만납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냥 주머니에 구겨 넣었는데, 그게 이렇게 쓸모 있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외국에서도 한국처럼 전단지 호객행위를 한다는 게 웃기면서도 묘하게 반가웠습니다. 유럽 중세 마을 골목에서 전단지라니, 어딘가 생뚱맞은 조합인데 이게 또 사람 사는 곳이라는 공통점을 느끼게 해줬습니다.

전단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 들어가니 순례자 메뉴(Menú del Peregrino)를 제공하는 아담한 식당이었습니다. 신선한 샐러드와 갓 구워낸 치킨 요리에 달콤한 푸딩 디저트까지 코스로 맛볼 수 있었고, 스페인 식사에서 빠질 수 없는 와인과 따뜻한 커피까지 곁들였습니다. 둘이서 배불리 먹고 나온 총금액은 37유로였는데, 지친 몸을 달래기에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하고 만족스러운 한 끼였습니다.

중세 돌길 골목 안에서 따뜻한 온기로 배를 채우며 알베르게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던 그 여유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어떤 날은 이렇게 우연히 손에 쥔 전단지 한 장이 고단한 하루를 구해주기도 한다는 사실이 카미노가 건네는 작은 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치며

남편의 컨디션 때문에 급하게 발걸음을 멈추고 들어선 12km였지만, 나바레테는 저희에게 길을 서두르지 않는 여유를 선물해 준 고마운 쉼표였습니다.

골목길에서 우연히 손에 쥔 전단지 한 장으로 따뜻한 식사를 챙겨 먹고, 오래된 돌길을 천천히 걸으며 서로의 보폭을 다시 맞출 수 있었습니다. 카미노를 걷다 보면 계획대로 되지 않는 날이 훨씬 많지만, 그 예상치 못한 멈춤 덕분에 오히려 길 위의 온기를 더 깊이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배운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