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11] 로그로뇨(Logroño) 기부제 알베르게에서의 특별한 하룻밤
로스 아르코스에서 아들 같은 청년들과 따뜻한 삼겹살 파티를 즐긴 다음 날, 저희 부부는 스페인 최고의 와인 고장인 대도시 '로그로뇨(Logroño)'로 향했습니다.
저희 부부가 순례길을 걸으며 생긴 아주 중요한 루틴이 하나 있습니다. 목적지 숙소에 도착해 샤워를 마친 뒤 잠깐 쉬면서, 반드시 그다음 날의 행선지와 알베르게를 미리 예약해 두는 일이었습니다.
순례길에서 시설이 좋거나 평이 좋은 알베르게는 막상 당일에 걸어서 방문하면 이미 예약이 꽉 차서 방을 잡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주로 '왓츠앱(WhatsApp)'을 이용하거나, 왓츠앱이 없는 곳은 이메일을 보내 꼼꼼하게 자리를 확보하고 다녔습니다. 매일 미리 예약을 해두니 걷는 동안 마음이 조급하지 않았고, 조금 늦게 도착하더라도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1. 로그로뇨 기부제(Donation) 알베르게가 준 신선한 경험
이번 로그로뇨에서는 조금 특별하게 기부제로 운영되는 도네이션 알베르게를 예약했습니다. 정해진 숙박비 대신 순례자가 원하는 만큼 성의껏 기부금을 내고 머무는 곳인데, 순례길의 오랜 전통과 정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입니다.
에스텔라 이후로 새벽 일찍 출발하는 습관이 붙어 이날도 비교적 이른 시간에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보다 훨씬 부지런하게 움직인 순례자들이 이미 많았던 탓에, 원하는 침대 위치를 선점하지는 못했습니다.
침대 위치는 조금 아쉬웠지만, 기부제 알베르게 특유의 소박하면서도 경건한 분위기는 저희에게 완전히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은 신선한 흥미로움을 주었습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 호스텔이나 사설 알베르게와 달리, 오직 순례자들을 향한 선의와 봉사로 채워진 공간에 머무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2. 경험해보지 않고는 모를 훌륭한 현지식 저녁 식사
이곳 기부제 알베르게의 진정한 매력은 저녁 시간에 찾아왔습니다. 숙소 공간뿐만 아니라 정성 가득한 저녁 식사까지 함께 제공해 주었는데, 식탁에 차려진 현지식 식사는 정말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정갈하고 훌륭했습니다.
화려한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은 아니었지만, 순례자들을 위해 오랫동안 뭉근하게 끓여낸 정성이 온 매 순간 맛으로 전해졌습니다. 식사 전후로는 다 함께 모여 교감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따뜻한 말씀이 이어지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기를 소개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비록 낯선 언어 탓에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완벽하게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공간을 가득 채운 온기와 사람들의 눈빛만으로도 무슨 뜻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식사를 하는 내내 테이블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국적과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가 하나의 가족이 된 듯한 따뜻한 행복감이 주방 가득 피어올랐습니다.
3. 서툰 스페인어로 전한 감사의 인사
순례길을 떠나기 전, 틈틈이 스페인어를 공부해 두었던 것이 이 뜻깊은 자리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아는 단어라고는 몇 안 되는 아주 기본적인 수준이었지만, 음식을 정성껏 장만해 주시고 대접해 주신 호스피탈레로(알베르게 자원봉사자) 관계자분들께 꼭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용기를 내어 다가가 서툰 스페인어로 "음식이 정말 맛있고 훌륭합니다.(¡Está delicioso! 에스타 델리시오소) 감사합니다.(gracias, 그라시아스)"라는 칭찬과 감사의 인사를 건넸습니다.
제 짧은 스페인어를 들은 관계자분들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무척이나 기뻐해 주셨습니다. 비록 유창한 대화는 나누지 못했어도, 정성껏 준비한 마음에 진심 어린 고마움으로 답하는 이 작은 소통이 참 보람차고 가슴 벅찼습니다.
낯선 이방인에게 베풀어 준 조건 없는 친절에 마음을 보태며, 로그로뇨에서의 밤은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마치며: 마음을 열 때 보이는 다른 세상
로그로뇨의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보낸 하루는, 우리가 조금만 마음을 열면 길 위에서 얼마나 따뜻한 세상과 마주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었습니다. 철저히 준비해서 방을 구하고, 서툴지만 현지어로 고마움을 표현하며 저희 부부는 그렇게 조금씩 진짜 순례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활기찬 대도시 로그로뇨를 뒤로하고, 나지막한 포도밭 길을 지나 흙과 도자기의 숨결이 살아있는 아늑한 중세 마을 '나바레테(Navarrete)'로 향하는 여정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길 위에서 만나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기대해 주세요.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