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15] 저마다의 사연을 짊어진 길, 그리고 벨로라도(Belorado)의 깜짝 선물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서의 연박은 지친 저의 몸을 회복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길 위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사연을 깊이 들여다보는 뜻깊은 시간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무작정 앞만 보고 바쁘게 걸을 때는 미처 보이지 않던 다른 순례자들의 모습이, 한걸음 물러서서 쉬어가다 보니 비로소 눈과 마음에 담기기 시작했습니다.

1. 쉼 없이 걷는 청년들과 길 위에서 만난 깊은 사연들

저희 부부는 컨디션에 맞춰 느긋하게 쉬어가며 걷는 편이라 일정을 계속 함께하는 한국인 순례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 청년들은 저희보다 생장에서 훨씬 늦게 출발했음에도 쉼 없이 걸어온 덕분에 이미 서로 많이 친해져 있었습니다.

모나코에서 온 한국인 친구를 비롯해 서로 의지하며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는 청년들의 밝은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또한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저마다의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 이 길을 걷는 이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심각한 병과 외롭게 싸우며 걷고 있는 외국인 순례자를 보며 차마 실례가 될까 봐 완치 여부를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묵묵한 발걸음 자체에 마음속으로 깊은 응원을 보냈습니다.

자폐증이 있는 아들과 함께 온 미국인 부부도 기억에 남습니다. 길을 걸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밝은 미소로 아들과 함께 걷다가도, 식사 시간이 되면 엄격하고 세심하게 아들을 가르치며 함께 밥을 먹는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2. 평범한 일상이 주는 위대한 감사함

길 위에서 마주친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세상에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은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가슴 깊이 밀려왔습니다. 누군가는 대체 왜 사서 고생을 하며 이 머나먼 타국의 길을 힘들게 걷는지 모르겠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길을 직접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묵직하고 가슴 벅찬 감정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도 묵묵히 한 걸음씩 내딛는 이들, 그리고 아들의 손을 꼭 잡고 걷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그동안 제가 당연하게 누려왔던 지극히 평범한 일상들이 얼마나 커다란 기적이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행운이나 거창한 성공이 없어도 그저 오늘 하루 무사히 걸을 수 있다는 사실, 사랑하는 사람과 건강하게 눈을 맞추며 한 끼 식사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할 만큼 고마웠습니다.

타인의 삶을 통해 내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이 가슴 벅찬 감정이야말로 순례길이 저희 부부에게 건네준 가장 고귀한 선물이었습니다.

3. 드넓은 들판을 지나 도착한 벨로라도, 그리고 와인 한 병의 보너스

그 깊은 마음의 깨달음과 감사를 품고, 저희 부부는 드넓고 푸른 들판이 끝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길을 걸어 다음 목적지인 '벨로라도(Belorado)'에 도착했습니다.

몸 상태가 완전히 좋아진 덕분에 발걸음도 한결 가벼웠고, 지평선 끝까지 피어난 푸른 들판을 바라보며 걷는 내내 오늘 하루 주어진 삶에 연신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무사히 도착한 벨로라도의 알베르게에서는 뜻밖의 소소한 즐거움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보통 다른 지역의 알베르게 식당에서는 순례자 메뉴를 시키면 와인을 딱 한 잔씩만 내어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기분 좋게 와인 한 병을 통째로 내어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고단했던 하루의 끝에 찾아온 이 깜짝 보너스 같은 와인 한 병 덕분에, 저희 부부는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이며 행복하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며: 삶의 무게를 나누며 걷는 길

벨로라도에서의 밤은 길 위에서 마주친 다양한 순례자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합니다. 저마다 품고 있는 삶의 무게는 달랐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걷고 있었고 그 존재 자체만으로 서로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어주고 있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벨로라도를 떠나,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의 완만한 산길을 넘어 붉은 흙과 아담한 성당이 반겨주는 마을 '산 후안 데 라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로 향하는 여정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길 위에서 조금씩 더 깊어지는 저희의 이야기를 계속 함께해 주세요.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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