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세스바예스에서 주비리: 빗속 자갈길과 뜻밖의 위로
순례길을 걷다 보면 "내가 사서 왜 이 고생을 하고 있지?" 싶은 순간이 온다는데, 저는 길을 나선 지 딱 이틀 만에 그 생각을 했습니다.
론세스바예스를 떠나 주비리로 내려가는 날이었습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미끄러운 돌길을 엉금엉금 내려가다 보니 정말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그날 저녁 주비리 숙소에서 마주한 친절과 시원한 샹그리아 한 잔 덕분에 하루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론세스바예스를 떠나던 날 아침, 제가 몰랐던 것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에서 눈을 뜬 둘째 날 아침은 생각보다 차분했습니다. 첫날 밤을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 덕분인지 마음도 가벼웠습니다. 큰 배낭은 동키 서비스로 다음 숙소에 먼저 보내두고, 작은 배낭 하나만 멘 채 주비리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문제는 제가 이 구간의 지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주비리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은 순례자들 사이에서 무릎과 발목에 무리가 많이 가는 험한 구간이었습니다.
거리 자체는 길지 않지만 약 500m 고도를 급격하게 내려가는 돌길이었습니다. 뾰족한 자갈과 젖은 진흙이 뒤섞인 비포장 비탈길이라 비까지 내리니 몹시 미끄러웠습니다. 오르막보다 이런 급경사 내리막이 관절에 훨씬 큰 부담을 준다는 사실을, 직접 걸어 내려가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빗속 자갈길, 처음 터진 후회
전날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이튿날에도 멈출 기색이 없었습니다. 방수 재킷 안으로 비바람이 파고들고, 뾰족한 돌부리 위로 빗물이 흘러내려 길 전체가 작은 개울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그 위를 50대의 두 무릎으로 버텨야 한다는 사실이 실감된 순간, 솔직히 눈앞이 아찔했습니다.
이때 저를 지켜준 것은 딱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한국에서 출발 전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 발 모양에 맞게 길들인 등산화였고, 다른 하나는 두 손에 쥔 등산 스틱이었습니다. 이 스틱은 내리막에서 체중을 분산시켜 무릎 관절에 가해지는 부담을 덜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스틱을 짚을 때마다 관절로 가는 충격이 크게 줄어드는 게 느껴졌는데, 제가 직접 겪어보니 스틱이 무릎 충격을 덜어준다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제 50대 무릎이 그 험한 길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양손에 쥔 스틱 덕분이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따뜻한 집을 놔두고 사서 이 고생을 하다니." 그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원망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 하나하나를 의식하면서 걷다 보니 후회할 시간도 없이 그냥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카미노라는 말이 왜 삶의 여정에 비유되는지 그 순간 처음으로 몸으로 이해했습니다.
주비리 알베르게에서 만난 위로, 그리고 샹그리아
마침내 주비리에 도착했을 때 저는 물에 빠진 생쥐 그 자체였습니다. 등산화 안까지 빗물이 스며들어 발걸음마다 젖은 소리가 났고, 다리는 제 것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알베르게 문을 열었을 때, 주인이 건넨 천사 같은 미소가 먼저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제가 미처 입도 떼기 전에, 주인은 젖은 제 등산화를 보더니 신문지를 뭉텅이로 가져와 신발 안에 채워 수분을 흡수시키라고 건네주셨습니다. 드라이어 열풍으로 말리면 등산화 가죽이 상하는데, 신문지를 뭉쳐 넣어두면 습기만 쏙 빠져 손상 없이 말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은 제 등산화를 직접 벽난로 앞 가장 따뜻한 자리에 가져다 놓아주셨습니다. 실제로 다음 날 아침 신발을 신어보니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적당하게 잘 말라 있었습니다. 알베르게 주인의 그 작은 행동 하나가 그날 하루의 모든 고생을 단번에 씻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샤워를 마치고 로비로 내려오니 알베르게에서 마주친 한국인 청년들이 함께 저녁을 해 먹자며 반갑게 권해주었습니다. 타국에서 만난 한국인이라 반갑고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50대인 저희 부부가 끼면 젊은 사람들의 대화나 자리가 괜히 불편해질까 봐 조심스러웠습니다. 마음만 감사히 받고 나와 근처 동네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식당에서 따끈한 치킨 요리와 함께 주문한 시원하고 달콤한 샹그리아 한 잔이 그날의 완벽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하루 종일 잔뜩 긴장했던 몸에 과일 향 가득한 와인이 한 모금 들어가는 순간, 꽁꽁 얼어붙었던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침대에 눕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지만, 그날 밤 마음은 출발 전날 밤보다 훨씬 든든하게 채워져 있었습니다.
순례길 실전 팁: 내리막길 완주 노하우
- 내리막길 등산 스틱 세팅과 보행법: 론세스바예스에서 주비리로 내려가는 길은 약 500m 고도를 뾰족한 자갈과 바윗길로 급격하게 내려가는 위험한 구간입니다. 이때 등산 스틱의 길이를 평지보다 5~10cm 정도 길게 늘려 몸 앞쪽 아래를 짚어주어야 무릎에 쏠리는 하중을 분산할 수 있습니다. 보폭을 평소의 절반으로 좁히고 지그재그로 천천히 발을 디뎌야 미끄러짐과 관절 부상을 막을 수 있습니다.
- 비 오는 날 우회 도로(도로변 길) 확인: 빗줄기가 굵어지면 흙길과 자갈길이 진흙탕 개울로 변해 매우 위험합니다. 악천후 시에는 무리하게 숲길 바윗길 코스를 고집하기보다, 마을을 연결하는 아스팔트 우회 도로(포장도로)를 선택해 걷는 것이 안전합니다.
- 젖은 등산화 건조 관리: 방수 등산화라도 장시간 비를 맞으면 발목 틈으로 빗물이 스며듭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깔창(인솔)을 먼저 분리하고, 신문지를 뭉쳐 신발 안쪽에 꽉 채워두면 밤사이 가죽 손상 없이 습기를 대부분 흡수합니다. 난로 바로 앞이나 헤어드라이어의 뜨거운 바람은 가죽을 수축시키고 방수 멤브레인(고어텍스 등)을 망가뜨리므로 미지근한 온기나 자연 건조를 거치는 것이 좋습니다.
마치며
주비리에서의 하루는 제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처음으로 '이 길의 진짜 매력'을 이해한 날이었습니다. 혹독한 자갈길과 비바람이 주는 고통, 그리고 그것을 덮어주는 낯선 이의 배려와 샹그리아 한 잔. 이 고통과 위로의 굴레가 반복되는 것이 카미노라는 길이 수백 년째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구간을 앞두고 계신 분이라면, 등산화와 등산 스틱 준비만큼은 꼭 철저히 해두시길 권합니다. 저처럼 아무 정보 없이 그 자갈길을 만나는 것은 제법 힘든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끝에 주비리처럼 따뜻한 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또한 이 길의 매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