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9] 에스텔라(Estella)에서의 첫 2박 연박, 비로소 시작된 즐기는 순례길
푸엔테 라 레이나를 떠나 도착한 다음 목적지는 중세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마을, '에스텔라(Estella)'였습니다.
이곳은 저희가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한 마을에서 2박을 하며 이틀 동안 머문 특별한 장소입니다.
첫날부터 시작된 변덕스러운 날씨와 험난한 길 때문에 몸과 마음이 제법 지쳐 있었기에, 열심히 걸어온 저희 자신에게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선물을 주기로 한 것입니다.
이 이틀간의 멈춤은 서툴렀던 초반의 긴장감을 내려놓고, 진짜 순례길의 매력을 즐기게 해 준 소중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 다인실 알베르게를 벗어난 호스텔에서의 아늑한 휴식
순례길에서 주로 머무는 알베르게는 저렴하고 순례자 분위기를 느끼기엔 좋지만,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서 자야 하기에 소음이나 사생활 면에서 피로가 쌓이기 쉽습니다.
특히 초반 체력 소모가 컸던 터라, 에스텔라에서는 과감하게 다인실이 아닌 작은 호스텔로 숙소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체크인을 하고 보니 기대했던 것보다 방이 훨씬 깨끗하고 아늑해서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따뜻한 방에서 온전한 휴식을 취하다 보니, 문득 여행을 떠나기 전 '힘들면 언제든 하루 더 쉬어가자'고 다짐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저희는 망설임 없이 이곳에서 하루 더 연박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남들은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다음 마을로 바쁘게 떠나갔지만, 저희는 침대에서 늑장 부리며 온전한 우리만의 속도를 선택했습니다.
이틀 동안 한 숙소에 짐을 풀어두고 편안하게 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몸의 피로가 절반은 날아가는 듯했습니다.
2. 스페인 마트 '디아(Dia)'에서 눈뜬 직접 요리해 먹는 즐거움
에스텔라는 아주 큰 도시는 아니지만, 스페인의 대표적인 대형 마트인 '디아(Dia)'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매번 식당을 찾아가 정해진 코스로 나오는 순례자 메뉴를 사 먹는 게 전부였는데, 이 마트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저희의 식생활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마트에서 신선한 현지 식재료와 저렴하고 맛 좋은 스페인 와인을 잔뜩 장을 봐와서 직접 음식을 해 먹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후로도 저희는 마을이 아닌 제법 큰 도심에 갈 때마다 '디아' 마트가 보이면 무조건 들르는 마니아가 되었습니다.
식당 번역기 때문에 쩔쩔맬 필요 없이, 우리가 먹고 싶은 고기와 채소를 사서 주방에서 뚝딱 조리해 먹는 맛이 정말 쏠쏠했습니다.
푹 쉬면서 좋아하는 와인도 곁들이고 직접 만든 음식을 먹으니, 팜플로나에서 느꼈던 서러움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돈도 아끼고 입맛도 돋우는 이 요리의 즐거움 덕분에 순례길의 저녁 시간이 한층 더 풍성해졌습니다.
3. 현지인의 여유를 배우고, 한국에서 챙겨온 최고의 꿀템을 맛보다
이틀 동안 머물며 비로소 제대로 된 마을 구경을 나섰습니다. 바쁘게 앞만 보고 걷던 길에서 벗어나 골목골목을 천천히 거닐다 보니, 광장이나 노천카페에서 조급함 없이 평화롭게 하루를 즐기는 스페인 현지인들의 여유로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일상 속에서 서두르지 않고 매 순간을 즐기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이제부터라도 정말 즐기면서 걸어야겠다'는 다짐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리를 시작하면서 한국에서 챙겨왔던 보물 같은 비상식량을 개시했습니다. 바로 뜨거운 물만 부으면 완성되는 '블럭 형식의 국'이었습니다.
타지 음식을 계속 먹다 보면 한 번씩 칼칼하고 뜨끈한 고국의 국물이 간절해지는데, 이 블럭 국은 무게도 거의 차지하지 않으면서 끓는 물만 부으면 훌륭한 한국의 맛을 재현해 주었습니다.
해외여행이나 장기 순례길을 준비하시는 분들에게 정말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최고의 아이템입니다.
이 고마운 국 블럭은 순례길뿐만 아니라 여정이 다 끝나고 포르투갈과 스페인 다른 지역을 여행할 때까지 아주 요긴하게 잘 활용했습니다.
마치며: 비로소 찾아온 진짜 여행의 시작
에스텔라에서의 첫 2박 휴식은 처음에 마음먹었던 '쉬면서 여행하자'는 다짐을 온전히 실천한 시간이었습니다.
잘 쉬고, 잘 먹고, 마음의 여유까지 충전하고 나니 신기하게도 다음 순례길부터는 정말 길 자체를 즐기면서 웃으며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몸을 쥐어짜며 걷는 고행이 아닌, 진정한 저만의 여정이 비로소 시작된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몸과 마음을 든든하게 재충전한 저희 부부가 에스텔라를 떠나, 순례길의 또 다른 명물인 무료 와인이 나오는 수도원인 '이라체 와인 샘(Fuente del Vino)'을 지나 로스 아르코스(Los Arcos)로 향하는 활기찬 여정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결 가벼워진 순례자의 발걸음을 기대해 주세요.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