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에스텔라: 첫 연박과 작은 주방에서 찾은 위로
'에스텔라(Estella)'는 저희가 순례길을 걷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연박을 한 장소입니다. 첫날부터 시작된 변덕스러운 날씨와 험난한 길 때문에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었기에, 열심히 걸어온 저희 자신에게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선물을 주기로 한 것입니다. 이 이틀간의 멈춤은 서툴렀던 초반의 긴장감을 내려놓고, 진짜 순례길의 매력을 즐기게 해 준 소중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지친 몸에 선물한 이틀간의 멈춤, 첫 연박
산티아고 순례길의 대표적인 숙소인 공립·사립 알베르게는 하룻밤 10~15유로 안팎으로 비용이 저렴하지만, 보통 10명에서 수십 명이 한 방에서 2층 침대를 함께 쓰는 다인실 구조입니다. 그러다 보니 새벽 네다섯 시부터 부스럭거리며 배낭을 싸는 소리,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코골이에 밤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초반 며칠은 걷는 긴장감으로 버티더라도, 밤마다 수면을 방해받다 보면 누적된 피로가 다리와 허리로 고스란히 전해져 다음 날 걷는 일 자체가 버거워집니다.
그래서 에스텔라에서는 다리의 피로도 풀 겸 다인실 대신 작은 호스텔 개인실을 예약했습니다. 막상 체크인을 하고 들어가 보니 예상보다 훨씬 깨끗하고 아늑한 방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때 떠오른 게 출발 전 '힘들면 언제든 하루 더 쉬자.' 하고 스스로와 한 약속이었습니다. 저희는 망설임 없이 프런트로 내려가 하루 더 묵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다행히 방에 여유가 있었고, 직원이 수수료가 빠져서인지 크진 않지만 약간의 숙박비 할인까지 기분 좋게 챙겨주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 다른 순례자들이 배낭을 메고 어둠 속으로 떠나는 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선택이 전혀 게으름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틀 치 짐을 한 곳에 풀어두고 쉰다는 사실만으로 피로가 절반은 사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동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직접 차린 저녁 식탁
순례길에서는 매 끼니 식당을 찾아 10~13유로짜리 순례자 메뉴(Menú del Peregrino)를 사 먹는 것이 당연한 일과였습니다. 전채 요리부터 본식, 후식과 와인까지 코스로 나와 가성비는 좋았지만, 며칠 내내 비슷한 구성이 반복되니 슬슬 물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매번 피곤한 몸으로 번역기를 켜고 긴장 속에 주문해야 하는 과정 자체가 은근한 스트레스였습니다.
그러다 에스텔라 골목을 산책하던 중 우연히 스페인의 중소형 슈퍼마켓 체인인 '디아(Dia)'를 발견했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니 싱싱한 파프리카와 토마토, 양파 같은 채소는 물론이고 닭가슴살과 돼지고기까지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어 무척 반가웠습니다. 여기에 현지인들이 일상에서 가볍게 곁들이는 2~3유로짜리 식탁용 와인 한 병을 장바구니에 담아 숙소로 향했습니다.
주방에서 올리브유를 넉넉하게 두르고 채소와 고기를 볶아내니,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우리 입맛에 꼭 맞는 훌륭한 저녁상이 차려졌습니다. 매번 식당을 찾아 헤매거나 다 먹고 서둘러 일어설 필요 없이, 남편과 마주 앉아 와인 한잔을 곁들이며 오늘 걸어온 길에 대해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배낭 속 작은 비상식량, 블럭 국 한 그릇의 위로
타지에서 며칠씩 낯선 현지 음식만 먹다 보면 누구나 칼칼하고 구수한 한국의 국물이 간절해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제 경우엔 에스텔라 숙소 주방을 쓰게 되면서 가방 깊숙이 넣어두었던 비상식량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한국에서 미리 챙겨온 동결건조 블럭 국이었습니다.
배낭 무게를 단 100g이라도 덜어내야 하는 장거리 도보 여행에서 이 블럭 국은 그야말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습니다. 부피도 거의 없고 무게 부담도 전혀 없는데, 냄비에 물을 끓여 붓기만 하면 30초 만에 구수한 된장국과 칼칼한 미역국이 뚝딱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완성된 따끈한 국물 한 모금을 넘기는 순간, 초반의 궂은 날씨와 험한 자갈길에 잔뜩 웅크리고 있던 몸과 마음의 긴장이 사르르 풀려내렸습니다. 거창한 보약은 아니었지만, 지친 타국 땅에서 이 익숙한 맛이 전해주는 온기야말로 다음 날 다시 배낭을 멜 수 있게 해 준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에스텔라에서의 이 소박한 저녁 식사를 계기로 저희의 순례길 식생활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후로는 숙소를 고를 때 주방 시설이 있는 알베르게를 가장 먼저 찾게 되었고, 오후에 목적지에 도착하면 동네 마트에서 장을 봐 입맛에 맞는 요리를 직접 만들어 먹는 것이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쉼이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순례길 실전 팁: 연박과 주방 활용 노하우
- 공립 vs 사립 알베르게 연박 규칙: 대부분의 공립 알베르게는 부상자가 아닌 이상 1박 원칙(연박 불가)이 엄격합니다. 에스텔라처럼 하루 온전히 쉬어가고 싶다면 사립 알베르게나 개인실 호스텔을 미리 확인해야 합니다.
- 식비 절약과 마트 영업시간: 순례자 정식(Menú del Peregrino)은 1인당 10~13유로 수준이라 매끼 사 먹으면 부담이 됩니다. 동네 디아(Dia) 마트에서 장을 보면 10유로 안팎으로 고기, 채소, 와인까지 넉넉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단, 일요일이나 공휴일, 시에스타(2시~5시)에는 문을 닫으므로 도착 직후 영업시간 확인이 필수입니다.
- 알베르게 공용 주방과 카미노 닌자 앱: 주방이 있는 숙소는 냄비와 조리도구는 물론 앞선 순례자들의 나눔 덕분에 식용유나 소금 같은 기본 양념도 잘 갖춰져 있습니다. '카미노 닌자(Camino Ninja)' 같은 순례길 앱에서 주방 유무를 미리 확인하고 숙소를 고르면 훨씬 편리합니다.
마치며
에스텔라는 저에게 단순히 지나쳐 가는 순례길 위의 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매일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다음 마을로 서둘러 가야 한다는 조급함에서 처음으로 벗어나 온전한 쉼을 준 곳이었습니다.
한낮의 햇살 아래 광장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는 현지인들을 바라보며, 완주라는 목표에만 매달려 정작 길 위의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습니다. 지친 몸에 하루의 쉼표를 찍어주고 따뜻한 밥상으로 기운을 채우고 나니, 비로소 남들의 속도가 아닌 온전히 저만의 보폭으로 길을 즐기며 걸어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