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로나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 용서의 언덕에서 마주친 칼바람과 경량 패딩
4월의 스페인이 이렇게 추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출발 전 여러 후기를 찾아봤는데 "봄이라 걷기 좋다"는 말만 잔뜩 읽었습니다.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ón)은 카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가장 먼저 마주치는 상징적인 고개입니다. 실제로 이곳에 올라섰을 때 몸이 휘청거릴 만큼 거센 칼바람과 뚝 떨어진 기온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세게 가슴을 흔들어놓은 무언가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용서의 언덕, 사진 뒤에 숨겨진 차가운 현실
용서의 언덕은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까지 이어지는 카미노 프란세스 루트의 대표적인 상징입니다. 해발 770m 고개 정상에는 1996년에 세워진 철제 순례자 군상 조형물이 사방이 탁 트인 능선을 배경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말을 탄 중세 기사부터 지팡이를 짚은 수도사까지, 서로 다른 시대의 순례자들이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 앞에 서니 설명하기 어려운 엄숙함이 느껴졌습니다.
"용서의 언덕에 오르면 지나온 모든 후회와 미움을 바람에 날려 보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지만, 막상 그 자리에 서보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기보다, 뒤처질까 봐 스스로를 쉼 없이 몰아세웠던 지난날의 나 자신을 가만히 놓아주는 순간에 더 가까웠습니다.
정상 한편에서 혼자 걷고 있던 한 청년이 유독 눈에 들어왔습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눠보니 한국에 있는 제 아들과 동갑이었습니다. 그 나이에 무슨 사연과 생각으로 이 먼 곳까지 홀로 오게 되었는지 속으로는 무척 궁금했지만, 낯선 어른의 참견이 부담스러울까 봐 차마 입 밖으로 묻지는 못했습니다.
저희 부부보다도 훨씬 느린 걸음으로 발걸음을 멈춰가며, 부는 바람과 사방으로 펼쳐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그 청년의 모습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앞만 보고 바쁘게 쫓기듯 걷기 바빴던 저와 달리, 저토록 젊은 나이에 혼자만의 속도로 길을 온전히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젊음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4월의 스페인 봄날, 살을 에는 능선의 칼바람
스페인 4월이라고 하면 어떤 풍경이 떠오르십니까? 올리브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 카페에서 마시는 시원한 음료... 저도 그런 장면을 상상하며 짐을 쌌습니다. 그런데 막상 순례길에 발을 디딘 첫 3~4일, 현실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스페인 북부 나바라 지방의 4월은 따뜻한 봄 날씨와 피레네 산맥에서 내려오는 찬 공기가 수시로 부딪히는 곳이었습니다. 한낮엔 볕이 따스하다가도 아침저녁 체감온도는 한국의 늦가을이나 초겨울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특히 용서의 언덕은 해발 700m가 넘는 데다 주변이 가로막힌 곳 없는 능선 지형이라 사방에서 바람이 한꺼번에 몰아쳤습니다. 언덕에 가까워질수록 바람 소리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낮게 웅웅거리다가 능선에 올라서는 순간 귓바퀴 안쪽이 아플 정도로 살을 에는 칼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 순간 가방에서 꺼내 입은 경량 패딩 지퍼를 턱 끝까지 올리며, 이걸 챙겨 오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량 패딩 하나가 바꿔놓은 것들
출발 전에 경량 패딩과 기모 레깅스를 배낭에 넣을까 말까 며칠을 망설였습니다. 배낭 무게는 보통 체중의 10% 이하로 맞추는 것이 정석이라, 100g이라도 덜어내야 하루 20km를 걸을 때 무릎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짐이 무거워지더라도 혹시 모를 추위로 감기에 걸리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과 필요없으면 버릴 마음으로 챙겨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옷가지는 초반 추위뿐 아니라 순례길 중반을 넘어설 때까지 매일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아침에 길을 나설 땐 입고 걷다가 몸에 열이 오르면 벗어서 배낭에 묶고, 찬 바람이 부는 고갯길을 만날 때마다 다시 꺼내 입는 식으로 체온을 조절했습니다. 배낭 무게를 몇백 그램 줄이는 것보다, 기온 변화에 맞춰 껴입을 수 있는 얇은 보온 옷을 챙기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고개를 넘어 푸엔테 라 레이나로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 훨씬 까다로웠습니다. 크고 작은 자갈과 굵은 돌멩이가 발밑에서 계속 미끄러지는 급경사 내리막길이라,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발목을 접지를 것 같아 한 걸음 뗄 때마다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습니다.
귓가를 때리던 바람은 잦아들었지만, 미끄러운 돌밭에서 중심을 잡느라 허벅지와 무릎에 온 신경이 쏠렸습니다. 다행히 든든하게 챙겨 입은 옷 덕분에 체온을 뺏기지 않아 지치지 않고 끝까지 집중해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긴장 속에 산길을 다 내려와 푸엔테 라 레이나 마을 어귀에 들어섰을 때 눈앞에 나타난 '왕의 다리'는 그 자체로 커다란 보상이었습니다. 아르가 강 위에 놓인 우아한 6개의 아치형 돌다리를 건너며, 오늘 하루도 칼바람과 험한 돌길을 무사히 이겨냈다는 벅찬 안도감이 밀려왔습니다.
순례길 실전 팁: 용서의 언덕 구간 주의사항
- 레이어드(겹쳐 입기) 보온 대책: 4월 스페인 북부는 평지와 능선의 기온 차가 극심합니다. 두꺼운 외투 하나보다 배낭에 부담이 없는 경량 패딩, 바람막이, 얇은 기모 의류를 여러 겹 챙겨 걸으며 땀이 나면 벗고 능선 바람을 맞을 때 껴입는 레이어드 방식이 체온 유지에 훨씬 유리합니다.
- 급경사 자갈 내리막길 대비: 용서의 언덕 정상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로 내려가는 길은 굵은 자갈과 돌멩이가 굴러다니는 미끄러운 급경사입니다. 스틱 길이를 평소보다 살짝 길게 조절해 체중을 분산하고, 보폭을 좁혀 천천히 내려와야 무릎 부담과 발목 부상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 중간 보급 확인: 언덕을 넘기 전 자리즈키에기(Zariquiegui) 마을 이후로는 고개를 넘어 내려갈 때까지 매점이나 쉼터가 마땅치 않습니다. 언덕 오르기 전에 식수와 간단한 간식을 미리 보충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마치며
4일 차의 순례길은 저에게 두 가지를 가르쳐줬습니다. 하나는 대자연 앞에서 얼마나 쉽게 겸손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소해 보이는 장비 하나에도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의 언덕 정상에서 몸은 떨고 있었지만, 내려오는 발걸음만큼은 그 어느 날보다 가벼웠습니다. 험난했던 적응기를 지나 이제는 제법 순례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짐을 쌀 때 경량 패딩과 기모 레깅스를 두고 한참 고민했던 저 자신을 돌아보면, 지금은 그때의 선택을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순례길을 준비 중인 분이 있다면, 보온 장비만큼은 무게보다 기능을 우선하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