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8] 인체의 신비와 용서의 언덕, 4월 스페인의 칼바람 속 나를 지켜준 두 가지 장비

대도시 팜플로나에서 한국 라면으로 겨우 위안을 삼고 잠자리에 들 때만 해도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다리는 끊어질 듯 아프고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어서, '과연 내일 아침에 내가 한 걸음이라도 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우려와 달리 다시 걸을 만한 기운이 남아있었습니다. 분명 어제 부서질 것처럼 아팠던 몸이었는데, 하룻밤 눈을 붙이고 일어났다고 다시 배낭을 메고 나설 수 있는 상태로 돌아와 준 것입니다.

매일 밤 방전되었다가 아침이면 어찌어찌 다시 충전되는 우리 신체의 회복 능력에 그저 감탄하며, 저희는 다음 목적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1. 4월 스페인의 매서운 추위, 배낭 무게를 이겨낸 신의 한 수

스페인의 4월은 따뜻할 것이라는 막연한 예상과 달리, 저희가 마주한 순례길 초반의 날씨는 생각보다 훨씬 매서웠습니다.

길을 나선 지 3~4일이 지나도록 쌀쌀한 공기가 몸을 움츠러들게 만들지요. 출발 전 한국에서 짐을 쌀 때, 단 100g의 무게라도 줄여보겠다고 가져갈까 말까 수없이 고심했던 두 가지 물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경량 패딩'과 '기모 레깅스'였습니다.

가방 부피와 무게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하다가 챙겨왔는데, 이 두 장비는 그야말로 이번 여정의 신의 한 수였습니다.

4월의 스페인은 바람이 한번 불기 시작하면 뼛속까지 시려왔기에, 이 두 옷가지가 없었다면 초반에 감기에 걸려 꼼꼼히 다져온 여정을 망쳤을지도 모릅니다.

초반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는 물론이고, 신기하게도 이 옷들은 순례길 중반을 넘어 거의 끝나는 날까지 매일같이 제 몸의 일부처럼 요긴하게 입게 되었습니다.

배낭 무게에 휘둘리지 않고 내 몸을 보호할 보온 의류를 챙긴 제 자신을 칭찬하고 싶은 순간이었습니다.

2. 바람 부는 용서의 언덕(Alto de Perdón)에서 올린 기도

푸엔테 라 레이나로 가는 길목에는 순례길의 상징이자 수많은 엽서에 등장하는 유명한 곳인 '용서의 언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철제로 만들어진 순례자들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는 그 고개에 가까워질수록, 지형 특성상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어마어마했습니다.

경량 패딩 지퍼를 턱끝까지 올리고 기모 레깅스로 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거센 칼바람이 몰아쳐 스페인의 혹독한 봄 날씨를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하지만 바람을 뚫고 마침내 언덕 정상에 서서 철제 순례자 동상들을 마주했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묘한 엄숙함과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지나온 과거의 모든 미움과 후회를 이 언덕에 바람과 함께 날려 보내고, 서로를 용서하라'는 이 공간의 깊은 의미를 가만히 새겨보며 남은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마음 모아 간절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문득 거친 바람 소리 사이로, "용서의 언덕은 누군가를 용서하는 곳이기 전에, 가장 먼저 나 자신을 용서하고 다시 걸어가기 위해 잠시 멈추는 곳이었다"는 생각이 마음을 스쳤습니다.

그동안 남들의 시선에 맞추어 사느라, 혹은 뒤처질까 봐 조급해하며 스스로를 몰아세웠던 지난날의 나를 가만히 안아주고 놓아주는 저만의 시간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추위로 덜덜 떨렸지만, 그 마음의 울림을 안고 내려오는 발걸음만큼은 그 어떤 날보다 가볍고 평온했습니다.

3. 마침내 다다라 마주한 푸엔테 라 레이나의 온기

용서의 언덕을 내려와 가파른 자갈길을 지나며 드디어 여덟 번째 이야기의 종착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던 순례길들이 하나로 모이는 곳이자, '왕의 다리'라는 뜻을 가진 아름다운 중세 돌다리가 있는 유서 깊은 마을입니다.

팜플로나에서의 아쉬움과 초반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고 마주한 이 마을의 아늑한 풍경은, 며칠 동안 긴장했던 저희 부부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었습니다.

매일 아침 살아나는 신체의 회복력 덕분에 무사히 이곳까지 올 수 있었고, 든든한 보온 옷들 덕분에 감기 걸리지 않고 무사히 하루를 마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함이 넘쳤습니다.

저녁을 먹고 숙소에 누워 창밖의 조용한 마을 풍경을 바라보니, 비로소 이 길의 매력에 아주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걱정으로 가득했던 초반의 발걸음은 어느새 단단해진 신뢰로 바뀌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치며: 대자연이 가르쳐준 겸손과 감사

눈을 뜨면 다시 걸을 힘을 주는 몸의 정직함, 그리고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마음을 데워준 용서의 언덕에서의 기도까지. 4일 차의 길은 저에게 대자연 앞에 겸손해지는 법과 사소한 장비 하나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험난했던 적응기를 지나, 이제는 제법 순례자의 걸음걸이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푸엔테 라 레이나를 떠나, 붉은 포도밭과 아름다운 중세 마을들이 끝없이 펼쳐지는 에스테야(Estella)로 향하는 아름다운 여정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길 위에서 조금씩 단단해지는 50대 순례자의 이야기를 계속 지켜봐 주세요.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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