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24] 레온 입성 전 꼭 거쳐야 할 중세 성벽 마을, 만시야

베르시아노스에서의 고즈넉한 하루를 뒤로하고 마침내 메세타의 핵심 거점이자, 대도시 '레온(León)'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관문 마을인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만시야는 순례자들에게 단순한 거쳐 가는 마을 그 이상의 의미를 줍니다. 산티아고 순례길 전체 코스 중 절반 가까이를 묵묵히 걸어내어 마침내 큰 도시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심리적 안도감과 뿌듯함이 크게 밀려오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전날 알베르게의 코골이 여파로 몸은 조금 무거웠지만, 새벽 공기의 차분함과 새로운 길에 대한 기대감을 가슴 가득 안고 24번째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 마을 입구의 순례자 기념비와 십자가 탑

1. 지루함 속의 평화로운 새벽길과 순례자 기념비

만시야로 향하는 새벽길은 메세타 평원 특유의 끝없이 펼쳐진 자갈길과 평지가 지평선 너머로 아득하게 이어졌습니다. 20일 넘게 순례길을 걸으며 누적된 피로 탓에 발걸음은 평소보다 묵직했지만, 귓가를 스치는 서늘한 새벽 공기와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 하늘이 묘한 위로를 건네주었습니다.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 하나 없이 탁 트인 길을 걷다 보니, 복잡했던 머릿속이 비워지고 오롯이 내 발밑에서 들려오는 자갈 밟는 소리에만 집중하게 되는 평화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지루함과 평온함이 교차하던 길을 묵묵히 걸어 마침내 만시야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때, 가장 먼저 저를 맞이해 준 것은 벤치에 앉아 지친 여정을 달래고 있는 순례자 기념비(Monumento al Peregrino)였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휴식을 취하는 동상의 모습이 어찌나 현실적이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지, 무거운 배낭을 메고 터덜터덜 걸어온 지금의 제 모습과 너무나 똑같아 절로 깊은 공감이 갔습니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 동상 곁을 지나며 인증샷을 남기고 지친 발걸음을 잠시 쉬어가는 이유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뭉클한 순간이었습니다.

2. 알베르게와 숙소의 현실: 예약과 적응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마을 알베르게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던 중, 무척 반가운 얼굴들과 마주쳤습니다. 놀랍게도 전날 같은 숙소에 머물렀던 순례자 4명이 똑같이 이곳에 예약을 하고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 고된 하루를 무사히 마친 것을 축하하며 인사를 나누다 보니, 낯선 타지에서도 이렇게 연달아 같은 숙소에서 마주치는 인연이 새삼 신기하고 기분 좋게 다가왔습니다. 길 위에서 맺어지는 소소하지만 따뜻한 연대감이었습니다.

대도시 레온 입성을 앞둔 마지막 거점 마을인 만큼, 만시야의 알베르게는 순례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무척 높습니다. 다행히 저희는 미리 예약을 해둔 덕분에 여유롭게 짐을 풀고 쉴 수 있었지만, 늦은 오후에 예약 없이 무작정 도착한 몇몇 순례자들은 남은 침대가 없어 아쉬운 표정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쉴 곳을 찾지 못해 지친 걸음으로 다시 무거운 배낭을 메고 밖을 나서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 구간을 지날 때 성수기라면 무조건 아침 일찍 움직이거나 사전에 예약을 해두는 것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겼습니다.

숙소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다 보니 문득 간밤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전날 밤잠을 설치게 했던 코골이의 주인공인 프랑스인 순례자와 같은 방을 배정받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순례길이 중반을 넘어갈수록 숙소 규모가 작아지고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보니, 방이 다르다고 해서 소음이 완벽히 차단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소음들이 은근한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누군가 오늘 하루 수십 킬로미터를 걸으며 쌓인 고단함을 털어내는 가장 자연스러운 숨소리이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결국 성능 좋은 귀마개를 챙기는 철저한 준비성 못지않게, 어떤 낯설고 불편한 환경 속에서도 타인을 이해하고 내 마음을 편히 다스려 잠자리에 드는 넉넉한 '적응력'이야말로 순례자가 이 길 위에서 반드시 배워야 할 중요한 숙제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의 웅장한 중세 성벽 모습

3. 시간 여행을 떠나는 중세 성벽과 산타 마리아 아치

만시야의 가장 큰 매력은 단연 마을 전체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웅장한 중세 성벽(Muralla de Mansilla)입니다. 며칠째 시야를 가리는 것 하나 없는 평평한 평원만 걷다가 불쑥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돌벽은 묘한 압도감을 주었습니다.

흙과 자갈을 층층이 다져 견고하게 쌓아 올린 이 성벽은, 과거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주민들을 지키는 동시에 광활하고 험난한 메세타 평원을 무사히 건너온 순례자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던 든든한 요새였습니다.

수백 년의 비바람을 견뎌냈음에도 여전히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내는 모습에 절로 탄성이 나왔습니다.단순히 한적한 시골 풍경만 이어질 줄 알았던 순례길에서 이토록 거대한 중세 성벽 사이로 난 길을 걷고 있자니, 마치 현실 세계를 벗어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 시대 스페인으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신비로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성벽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만시야의 4개 성문 중 원형이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산타 마리아 아치(Puerta de Santa María)에 다다르게 됩니다. 둥글고 육중한 돌문 아래를 통과하며, 수백 년 전 나와 똑같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이 문을 지나갔을 옛 순례자들의 발자취를 상상해 보는 것도 순례길이 주는 또 다른 묘미였습니다.

아치를 지나 아담하고 정겨운 산타 마리아 성당을 둘러보고 나니, 마을 특유의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온몸을 감싸며 걷느라 지친 몸을 포근하게 달래주었습니다.

화려하고 번잡한 대도시 레온으로 들어가기 전, 옛 중세 마을의 정취 속에서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에너지를 재충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안식처였습니다.

마치며: 레온을 향한 설렘을 품고

평소보다 조금은 고단하게 출발했던 만시야행 여정이었지만, 길 위에서 만난 멋진 인연들과 현실감 넘치는 순례자 동상, 그리고 중세 성벽의 웅장함 덕분에 피로보다 훨씬 더 큰 감동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만시야는 순례길의 절반을 무사히 걸어왔다는 자부심과 함께, 곧 만나게 될 대도시 레온에 대한 기대감을 동시에 선물해 주는 멋진 마을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드디어 메세타 지대의 하이라이트이자 아름다운 대성당이 기다리고 있는 대도시 '레온(León)'으로의 여정을 이어가겠습니다. 늘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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