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포나라야에서 트라바델로: 비에르소 포도밭과 용서의 문
카스티야 이 레온(Castilla y León) 지방의 서쪽 끝자락에 들어서자,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과 평화로운 과수원 풍경이 눈앞에 가득 찼습니다. 캄포나라야를 떠나 트라바델로까지 향하는 길은 이제 막 갈리시아의 웅장한 산맥으로 진입하기 직전, 완만한 언덕과 아기자기한 마을들이 순례자를 맞이하는 인상적인 구간입니다.
- 출발지: 캄포나라야(Camponaraya)
- 도착지: 트라바델로(Trabadelo)
- 총 거리: 약 25km 안팎
- 주요 경유지: 카카벨로스 → 피에로스 →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 페레헤
- 예상 소요시간: 개인의 보행 속도와 휴식에 따라 약 6~8 시간
- 길의 특징: 포도밭과 농경지를 지나 비에르소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
- 주요 볼거리: 카카벨로스의 성당과 성소,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의 산티아고 성당과 용서의 문, 성채와 역사 지구
191km의 이정표와 고요한 포도밭 길
유독 잡념이 사라지고 오롯이 발걸음에만 집중하게 되는 날이 있습니다. 특별한 사건이나 대화 없이도 흙길을 딛는 등산화 소리와 스틱이 바닥을 짚는 일정한 박자만이 귓가를 울리던 하루였습니다. 캄포나라야(Camponaraya)를 떠나 트라바델로(Trabadelo)로 향하던 날이 바로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캄포나라야 마을을 벗어나면 평화로운 농경지와 붉은 흙길이 펼쳐지며 완만한 비에르소(Bierzo) 와인 산지가 시야를 가득 채웁니다. 이 지역은 스페인 토착 품종인 멘시아(Mencía) 포도로 빚어낸 와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계절 탓에 아직 잎을 틔우지 못한 앙상한 포도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는데, 그 메마른 가지들을 바라보며 걷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비에르소의 구릉 지대를 따라 걷다 길가에 우뚝 선 모혼(순례길 비석)에서 선명한 '191km' 표식을 마주했습니다. 매일 무심히 지나치던 비석이었지만,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200km의 벽이 깨지는 순간이라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Saint-Jean-Pied-de-Port)에서부터 걸어온 600km가 넘는 시간의 궤적과 앞으로 남은 여정의 무게가 교차하며, 복잡한 생각 대신 한 걸음씩 묵묵히 나아갈 수 있는 단단한 용기가 채워졌습니다.
중세의 시간을 품은 작은 산티아고, 비야프랑카
포도밭 길을 지나 완만한 언덕을 넘어서자 '작은 산티아고'라 불리는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산티아고 성당의 용서의 문입니다.
비야프랑카의 상징인 산티아고 성당(Iglesia de Santiago)은 12세기 말에 건축된 대표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입니다. 특히 북쪽 외벽에 위치한 '용서의 문(Puerta del Perdón)'은 순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지닙니다. 과거 중세 시대에 험난한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 산맥을 넘을 수 없을 정도로 병들거나 다친 순례자들을 위해, 로마 교황청의 특권으로 이곳에서 미사를 드려도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한 것과 동등한 전대사(사죄)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찾아간 날은 마침 용서의 문 주변으로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공사용 가림막 너머로 성당의 외관을 조심스레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가림막 때문에 문 전체를 보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수많은 순례자가 거쳐 갔을 오래된 돌벽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 세월의 무게가 전해지는 듯했습니다.
골목을 따라 마을 중심부로 들어가면 웅장한 원형 탑을 자랑하는 16세기 비야프랑카 후작의 성(Castillo-Palacio)과 산 니콜라스 엘 레알 수도원이 차례로 나타납니다. 시골 풍경 속 웅장하게 자리 잡은 중세 석조 건물들은 비야프랑카가 왜 '작은 산티아고(Santiago Pequeño)'라는 별칭으로 불리는지 그 역사적 깊이를 실감케 했습니다.
발카르세강을 건너 계곡길의 시작점 트라바델로로
비야프랑카의 유구한 역사가 깃든 골목을 빠져나오면 부르비아강(Río Burbia)을 가로지르는 중세 돌다리가 나타납니다. 다리 위에서 지팡이를 쥔 채 묵묵히 서 있는 순례자 석상은 험난한 오 세브레이로를 앞둔 저희를 조용히 배웅해 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을을 벗어나는 지점에서는 두 갈래 길이 나옵니다.
- 프라델라(Pradela) 산길 코스: 가파른 능선을 타는 힘든 구간이지만, 비에르소 분지의 장엄한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는 길입니다.
- 발카르세(Valcarce) 계곡길 코스 (트라바델로 방면): 맑은 강물 소리와 완만한 도로변 데크를 따라 걷는 평탄한 길로, 내일 닥쳐올 가파른 오르막을 대비해 무릎과 체력을 안배하기에 좋은 선택지입니다.
프라델라 산길의 풍경도 욕심이 났지만, 내일 오르막에서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완만한 발카르세 계곡 코스를 택해 걸음을 이어갔습니다. 중간 쉼터인 아담한 돌집 마을 페레헤(Pereje)를 지나 울창한 밤나무 숲길을 천천히 걷다 보니, 마침내 오늘 여정의 종착지인 트라바델로(Trabadelo)에 들어섰습니다.
약 25km의 길었던 포도밭과 계곡길 걷기를 마치고 배낭을 내려놓자 깊은 안도감이 찾아왔습니다. 트라바델로는 규모가 매우 작은 마을이지만, 순례자 전용 알베르게와 작은 바(Bar)가 있어 조용히 쉬어가기에 충분했습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험난한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 산길을 대비해 저녁을 든든히 챙겨 먹고 평소보다 훨씬 일찍 잠자리에 들며 컨디션을 조절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캄포나라야에서 트라바델로까지 총 거리와 소요 시간은 어느 정도인가요?
A. 일반적인 루트 기준 약 25km이며, 개인 보행 속도와 중간 마을(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에서의 휴식 시간에 따라 약 6~8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Q.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산티아고 성당의 '용서의 문'은 왜 중요한가요?
A. 12세기 교황 칙서로 부여된 특권 덕분입니다. 과거 중세 시대 험난한 오 세브레이로 산맥을 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순례자가 이곳에서 미사를 드리면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한 것과 동일한 전대사(죄의 사함)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Q. 비야프랑카 출구 갈림길(프라델라 vs 발카르세) 중 어디를 선택해야 할까요?
A. 다음 날 이어지는 가파른 오 세브레이로 산악 구간을 대비해 무릎 부담을 줄이고 체력을 아끼려면 평탄한 발카르세 계곡 코스(트라바델로 방면)를 선택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웅장한 능선 풍경을 원한다면 프라델라 산길 코스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마치며
비록 거창한 사건은 없었지만, 191km 표지석을 마주했을 때의 벅참과 포도밭 사이로 불어오던 바람 소리만으로도 마음이 온전히 채워지는 하루였습니다.
★ 산티아고 순례길 이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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