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토르가에서 라바날 델 카미노: 마라가테리아 마을, 한국인 신부님

아스토르가(Astorga)를 출발해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로 향하는 약 20km 길은 메세타의 평평한 풍경에서 벗어나 조금씩 산악 지형으로 들어가는 구간입니다. 단순히 '힘들다'기보다는 '아, 우리가 조금씩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서서히 전해지는 길이었습니다.

  • 출발지: 아스토르가(Astorga)
  • 도착지: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
  • 총 거리: 약 20.5km
  • 주요 경유지: 발데비에하스 → 무리아스 데 레치발도 → 산타 카탈리나 데 소모사 → 엘 간소
  • 주요 볼거리: 에케 호모 예배당, 카스트리요 데 로스 폴바사레스, 산타 카탈리나 데 소모사, 엘 간소, 푸엔테 델 파뇨테, 라 푸카로나 로마 금광 유적
  • 길의 특징: 전반적으로 경사가 완만하지만, 라바날에 가까워질수록 고도가 서서히 높아지는 지속적인 오르막길
  • 기온 변화: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바람이 차가워집니다. 라바날 델 카미노는 해발 1,150m에 위치해 있어 도착 후 기온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으니 방풍 자켓을 배낭 상단에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이 구간은 마라가토(Maragato)라 불리는 이 지역 특유의 독특한 문화와 전통 건축 양식이 보존되어 있어, 순례길 중에서도 고풍스러운 정취를 가장 깊게 느낄 수 있는 코스이기도 합니다.

제주도를 연상시키는 마라가테리아의 마을 골목길 풍경

돌집과 돌담이 이어지는 마라가테리아의 마을들

라바날로 향하는 길목에서는 유난히 돌집과 돌담으로 둘러싸인 마을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곳은 '마라가토(Maragato)'라 불리는 이 지역 고유의 전통 건축 양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입니다. 주변 산지에서 채취한 붉은빛과 갈색이 감도는 점판암과 단단한 돌을 쌓아 외벽을 올리고, 눈과 바람이 거센 산악 기후를 견디기 위해 지붕에는 납작한 슬레이트 기와를 얹은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과거 노새와 마차로 교역을 하던 마라가토인들의 생활상에 맞춰, 마차가 안마당까지 드나들 수 있도록 큼직한 아치형 목재 대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양옆으로 늘어선 집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낯선 스페인 땅이 아니라 마치 한국의 제주도 돌담길을 걷는 듯 정겹고 친근한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특히 이 구간에서 만나는 산타 카탈리나 데 소모사(Santa Catalina de Somoza)와 주변 마을들은 마라가테리아 특유의 정취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을 중심 도로인 '칼레 레알(Calle Real)'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시간에 쫓겨 골목 구석구석을 다 둘러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눈에 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라바날로 이어지는 길가에는 유난히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십자가 주변마다 순례자들이 저마다의 소원과 추억을 담아 올려둔 작은 돌멩이, 글귀, 사진들이 하나의 따뜻한 풍경으로 쌓여 있어 걷는 걸음마다 뭉클한 감동을 더해주었습니다.

라바날 델 카미노, 순례길과 함께 살아온 마을

아스토르가와 폰세바돈 사이에 자리한 라바날 델 카미노는 중세 필독서인 『코덱스 칼릭스티누스(Codex Calixtinus)』에도 기록될 만큼 오랜 역사를 품은 순례의 요충지입니다. 험준한 폰세바돈과 '철의 십자가(Cruz de Ferro)'를 넘기 전 체력을 다지는 마지막 관문이었기에, 12세기에는 성전기사단(Templars)이 주둔하며 순례자 구호소와 성당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마을 중심 도로인 '칼레 레알(Calle Real)'을 따라 걷다 보면 순례의 역사와 함께해 온 주요 유적들을 만나게 됩니다.

  • 성모 승천 교회(Iglesia de la Asunción): 12세기 말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여러 차례 개수되었습니다.
  • 산 호세 예배당(Ermita de San José): 1733년에 세워진 바로크 양식의 예배당으로, 마라가테리아 지역의 건축적 특징을 보여줍니다.
  • 산 살바도르 수도원(Monasterio de San Salvador): 순례자들의 영적 쉼터 역할을 해온 곳으로, 2001년부터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이곳에서 순례자들을 맞이해 왔습니다.

당시에는 그저 작은 산골 마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라바날 델 카미노는 단순히 하루 쉬어 가는 장소가 아니라 오랜 세월 순례자를 맞아온 역사적인 마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인 신부님이 전수해서 만든 김치와 라면 그리고 햇반

타향에서 만난 한국인 신부님과 고향의 맛

라바날 델 카미노에 도착했을 때,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로 이 조용한 시골 마을에 한국인 신부님이 머물고 계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현지 알베르게에 직접 김치 담그는 법까지 알려주셨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우리가 머문 알베르게 입구에는 여러 나라 언어로 적힌 성경 구절 사이에 반가운 한글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타국에서 만난 익숙한 고향 글자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따뜻해졌습니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망설임 없이 라면과 김치, 그리고 구하기 어려웠던 햇반까지 함께 주문했습니다. 얼큰한 라면 국물에 잘 익은 김치 한 점을 곁들이니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순간에 싹 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이국땅에서 고향의 언어를 접하고 정성 어린 한식을 맛보면서 느낀 그 먹먹하고 뭉클한 감정은 지금도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신부님이 워낙 바쁘셔서 긴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고 반갑게 인사만 건네고 돌아섰지만, 멀리 스페인 시골 마을에서 만난 신부님의 마음 덕분에 순례길 위에서 다시 걸어 나갈 큰 힘을 얻었습니다.

마치며

아스토르가에서 라바날 델 카미노까지의 길은 단순히 다음 마을로 이동하는 하루의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돌담과 돌집을 바라보며 제주도의 돌담을 떠올렸고, 무엇보다 오래 기억에 남은 것은 라바날 델 카미노에서 만난 한글과 한국인 신부님, 그리고 라면과 김치였습니다.

800km를 걸어가는 순례길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작은 만남 하나가 지친 몸과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합니다. 저희에게 라바날 델 카미노는 바로 그런 따뜻한 기억이 남아 있는 마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