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에서 산 마르틴 델 카미노: 파라모 평원, 순례자 마을, 알베르게의 저녁

레온 대성당과 활기찼던 도심을 뒤로하고 다시 길 위로 발걸음을 옮길 때는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보통은 새벽 일찍 일어나 걸으면 붉게 물드는 멋진 일출을 맞이하곤 했는데, 레온을 떠나는 새벽길은 도로변의 가로등과 은은한 네온사인이 길을 밝혀주었습니다.

  • 출발지: 레온(León)
  • 도착지: 산 마르틴 델 카미노(San Martín del Camino)
  • 총 거리: 약 25km
  • 주요 경유지: 트로바호 델 카미노 → 라 비르헨 델 카미노 → 발베르데 데 라 비르헨 → 산 미겔 델 카미노 →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 → 산 마르틴 델 카미노
  • 길의 특징: 초반 도시·도로 구간 이후 평탄한 파라모 지대가 이어지는 길
  • 주요 볼거리: 산 마르코스 수도원, 라 비르헨 델 카미노 성당, 비야당고스의 산티아고 성당, 산 마르틴 성당
  • 갈림길 선택 (비르헨 델 카미노): 비르헨 델 카미노 마을을 지나면 국도(N-120)를 따르는 직선 코스와 전원 마을로 우회하는 빌랴르 데 마사리페 코스로 나뉩니다. 산 마르틴 코스는 거리가 짧지만 도로변을 걸어야 하고, 빌랴르 코스는 고요하지만 약 4~5km 더 깁니다.
레온을 떠나 새벽  도심의 가로등과 네온사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풍경

레온을 벗어나 걸었던 회색빛 산업단지 길

레온 도심을 빠져나오면 산 마르코스 광장과 옛 산 마르코스 수도원 앞을 지나게 됩니다. 이후 산 마르코스 다리를 건너 베르네스가(Bernesga) 강을 지나며 본격적으로 레온을 벗어났습니다.

이곳에서부터 한동안은 순례길다운 풍경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트로바호 델 카미노(Trobajo del Camino)를 지나면서 도로와 철도, 상업시설이 이어졌고 산업단지와 차량이 오가는 구간이 길게 이어졌습니다.

저 역시 이 길을 걸으며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레온에서는 멋진 성당과 오래된 건축물을 둘러보며 하루를 보냈는데,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공장과 물류창고, 도로 주변의 삭막한 회색빛 풍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공장과 아스팔트 도로만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왜 이런 길을 순례길로 만들었을까’ 하는 아쉬움과 피로감이 먼저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라 비르헨 델 카미노 성당을 지나 파라모 평원으로

레온을 빠져나온 길은 트로바호 델 카미노를 지나 라 비르헨 델 카미노(La Virgen del Camino)로 이어집니다. 레온에서 약 7km 정도 떨어진 이곳은 순례길에서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이곳에서 국도 N-120을 따라가는 전통 노선과 비야르 데 마사리페로 향하는 남쪽 변형 루트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저희는 남쪽으로 우회하지 않고 기존 길을 따라 산 마르틴 델 카미노로 향했습니다.

마을 중심에 자리한 라 비르헨 델 카미노 성당(Basílica de la Virgen del Camino)은 1961년 완공된 현대 건축물로, 조각가 수비라치가 만든 13개의 대형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어 중세 성당과는 또 다른 독특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 성당을 지나 발베르데 데 라 비르헨과 산 미겔 델 카미노로 접어들면 복잡했던 도시의 흔적이 점차 사라졌습니다. 길게 이어졌던 공장과 소음이 없어지고,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과 지평선까지 뻗은 넓은 파라모(Páramo) 평원이 펼쳐졌습니다. 귓가를 맴돌던 차 소리 대신 흙을 밟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레온을 빠져나오며 느꼈던 답답함도 시원하게 풀려나갔습니다.

레온 도심을 벗어나 탁 트인 평원길의 순례자 이정표

평원길에서 만난 오래된 순례자의 마을

산 미겔 델 카미노를 지나면 길은 계속해서 N-120 주변의 평탄한 지형을 따라갑니다. 이후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Villadangos del Páramo)를 지나 이날의 목적지인 산 마르틴 델 카미노로 향했습니다.

비야당고스는 단순한 중간 경유지가 아닙니다. 1111년 레온의 우라카 여왕과 아라곤의 알폰소 1세 사이의 전투가 벌어진 유서 깊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비야당고스를 지나면 다시 도로 주변과 흙길이 번갈아 나타납니다. 특별한 오르내림이 없어 체력적인 부담은 적었지만, 끝없는 직선 주로가 이어져 심리적으로는 단조롭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단순함 속에서 비로소 주변 풍경 대신 제 발걸음과 숨소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멀리 산 마르틴 델 카미노를 알리는 독특한 모양의 물탱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끝없이 이어진 평원 길 끝에서 마주한 반가운 이정표였습니다.

산 마르틴 델 카미노는 중세 시대 순례자들의 안전한 쉼터 역할을 하던 마을입니다. 사방이 트인 황량한 평원 지대라 밤이면 강도나 야생동물의 위험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에 순례자들이 안전하게 묵어갈 수 있도록 가난한 이에게 외투를 나눠준 성 마르티노(St. Martin)의 뜻을 기리는 숙소들이 들어섰고, 이것이 지금의 마을로 이어졌습니다.

마을 중심에는 그를 기리는 산 마르틴 성당(Iglesia de San Martín)이 자리하고 있어, 긴 평원길 끝에 잠시 들러 쉬어가기 좋았습니다.

공립 알베르게의 소박한 휴식과 순례자의 저녁

제가 머물렀던 공립 알베르게는 지금까지 숙박했던 곳 가운데 가장 저렴했던 곳으로, 당시 기준 6유로였습니다. 주방은 있었지만 간단하게 데워 먹는 정도만 가능해서, 체크인할 때 호스피탈레로가 저녁 식사를 함께할 것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고민할 것 없이 저녁을 신청했고, 숙박비와 공동 저녁 식사비를 합쳐 2인 기준 총 36유로를 지불했습니다.

시설에서는 조금 연식이 느껴졌지만 숙소에 꼭 새것 같은 시설만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넓게 트인 정원에는 나무 그늘 아래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곳에서 빨래를 널어두고 다른 순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혼자 조용히 쉬기에도 좋았습니다.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신발을 벗은 뒤 가벼운 슬리퍼로 갈아 신고 마을의 작은 바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셨습니다. 수십 km를 걸어온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날 저녁에는 공립 알베르게에 머물던 순례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순례자 메뉴를 나누어 먹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딸과 함께 길을 걷던 한 외국인 아빠와 그의 동서였습니다. 쉽게 보기 힘든 가족 조합이었지만 서로를 챙기며 함께 길을 걷는 모습이 참 따뜻하고 인상 깊었습니다.

사실 저는 여러 순례자가 한자리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자리가 여전히 조금 어색하고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외국인 젊은 순례자들은 언어가 조금 달라도 금방 친해지고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처럼 보였는데, 저는 그 모습을 보며‘내가 나이를 너무 신경 쓰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과 함께 언어의 장벽 앞에서 만감이 교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서툴고 어색했던 순간까지도 순례길에서만 경험할 수 있었던 소중한 추억입니다. 서로 완벽하게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식탁에 앉아 하루를 마무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느 순간 우리는 순례자라는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레온에서 산 마르틴 델 카미노까지 하루에 걸을 수 있나요?

A. 네. 거리는 약 25km이며 경사가 거의 없는 평탄한 파라모 지대라 대부분 하루 일정으로 무리 없이 이동합니다. 다만 초반 아스팔트와 도로변을 오래 걸어야 하므로 발바닥 피로도 관리에 신경 쓰는 것이 좋습니다.

Q. 도로변 코스(산 마르틴 델 카미노)를 걸을 때 주의할 점은 무엇인가요?

A. N-120 국도를 따라가는 구간은 차량 소음이 다소 발생하며 그늘이 거의 없습니다. 햇빛을 가릴 모자와 충분한 식수를 미리 준비하시고, 차도 옆 보행자용 흙길로 안전하게 걷는 것을 권장합니다.

Q. 산 마르틴 델 카미노 마을 내 편의시설(식료품점, 식당)은 충분한가요?

A. 큰 대형마트는 없지만, 순례자 메뉴를 제공하는 로컬 바와 간단한 생필품 및 간식을 살 수 있는 소형 가게가 운영되고 있어 하루 머물며 식사나 휴식을 취하기에 충분합니다.

마치며

레온에서 산 마르틴 델 카미노까지의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회색빛 도시를 뒤로하고 파라모의 넓은 평원으로 들어서는 순간, 순례길의 공기와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저는 이 구간을 걷고 나서야 비로소 ‘순례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걷는 과정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화려한 도시를 벗어나 평범한 시골길을 걷고, 작은 마을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낯선 이들과 같은 식탁에 앉는 소박한 순간들이 모여 산티아고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을 완성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