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시야에서 레온: 레온 대성당, 카사 보티네스
메세타의 평탄하지만 단조로웠던 황토색 지평선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고, 길가 옆으로 차츰 문명의 소음이 커지는 구간입니다.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의 정겨운 중세 성벽을 뒤로하고 출발하는 아침은, 오랫동안 자연과 고독 속에 파묻혀 있던 몸이 다시 활기찬 대도시로 진입한다는 기대감과 긴장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습니다.
- 출발지: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
- 도착지: 레온(León)
- 총 거리: 약 17km
- 길의 특징: 비교적 짧은 거리로 레온까지 이어지는 순례길
- 주요 경유지: 비야모로스 데 만시야, 비야렌테 등
- 주요 볼거리: 레온 대성당, 산 이시도로 대성당, 카사 보티네스 등
이번 구간은 비교적 거리가 짧아 체력적인 부담은 덜하지만, 아스팔트 도로변을 따라 걷는 구간이 많아 발바닥에 전달되는 피로감이 은근히 쌓이는 코스입니다. 하지만 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카스티야 레온 왕국의 찬란한 수도, 레온(León)에 다가갈수록 걷는 발걸음은 자연스레 가벼웠습니다.
작은 마을을 지나 드디어 만나는 대도시, 레온
며칠 동안 메세타의 조용한 흙길만 걷다 보니, 차들의 소음과 길게 뻗은 도로가 나타나자 감각이 깨어나는 듯했습니다. 레온 외곽에 들어서자 멀리서 익숙한 노란색 엠블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맥도널드였습니다.
순례길 위에서 만난 햄버거 패스트푸드점이 이토록 반가울 줄은 몰랐습니다. 망설임 없이 들어가 주문한 햄버거 세트와 시원한 콜라 한 잔은 그동안 현지 순례자 메뉴로 지쳐있던 입맛에 커다란 행복을 안겨주었습니다. "드디어 내가 문명으로 돌아왔구나" 하는 감격이 햄버거를 먹는 내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레온은 서기 68년 로마 제7군단(Legio VII Gemina)이 진영을 구축하면서 형성된 깊은 역사를 가진 도시입니다. '레온'이라는 도시 이름 역시 로마어 '레기오(Legio, 군단)'에서 유래했습니다. 10세기경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수도로 지정되면서 순례길의 핵심 거점이자 문화,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대번영을 누렸습니다.
시내 중심부로 들어서자 넓은 도로 위를 달리는 버스와 트램, 활기차게 옷을 차려입은 시내 주민들, 밝은 표정의 관광객들로 거리 전체가 생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길가에 빼곡히 들어선 카페와 테라스 레스토랑을 지나며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졌습니다.
레온은 순례자들에게 단순한 경유지가 아닙니다. 대형 마트인 까르푸(Carrefour)를 비롯해 온갖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수많은 순례자가 이곳에서 하루쯤 쉬어가는 레스트 데이(Rest Day)를 선택합니다. 밀린 빨래를 싹 돌리고, 약국에 들러 발 관리에 필요한 약품을 챙기며 다음 여정을 준비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도시는 없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문화와 풍경을 여유 있게 즐기려면 오후 늦게 도착하기보다 오전이나 이른 오후에 일찍 도착하는 일정을 추천합니다. 저희 역시 이날 일찍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배낭을 던져놓고, 신발을 가벼운 운동화로 갈아신은 채 시내를 구경하러 나섰습니다. 배낭 없는 어깨가 어찌나 가볍던지, 단순한 순례길 여정이 아니라 스페인의 멋진 도시에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레온 대성당, ‘빛의 성당’이라 불리는 이유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레온의 상징과도 같은 레온 대성당(Catedral de León)이었습니다. 이곳은 13세기에 본격적으로 건축된 프랑스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기존 로마네스크 성당과 오르도뇨 2세의 궁전, 로마 시대 목욕시설이 있던 자리에 1205년경부터 세워졌습니다.
건축 역사도 깊지만, 사진으로 보았던 것보다 실제로 마주한 대성당은 훨씬 인상적이었습니다. 고딕 양식의 높은 건물과 섬세한 장식 너머로 저를 가장 오래 붙잡아 둔 것은 성당 내부를 가득 채운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였습니다.
이 성당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웅장한 규모뿐만이 아닙니다. 레온 관광청 공식 안내에 따르면, 성당 내부에는 13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제작된 737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있으며, 전체 면적이 약 1,765㎡에 이른다고 소개합니다.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성당 내부에 색을 입히면서 공간 전체가 달라 보입니다. 그래서 레온 대성당은 '빛의 성당’이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성인과 예언자, 레온의 식물과 문장이 정교하게 새겨진 스테인드글라스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 빛 하나하나에 중세의 역사와 신앙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듯했습니다.
관람을 마친 뒤에는 이곳에서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시알에 도장(스탬프)을 받았습니다. 웅장한 대성당의 아름다움과 함께 순례길의 또 다른 소중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산 이시도로 대성당에서 만난 레온 왕국의 역사
대성당을 둘러본 뒤에는 산 이시도로 대성당(Basílica de San Isidoro)으로 향했습니다.
레온 대성당이 화려한 빛과 고딕 건축으로 강한 인상을 주었다면, 산 이시도로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오래된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차분함이 느껴졌고, 화려함보다는 묵직하고 편안한 느낌이 남았습니다.
산 이시도로는 스페인 로마네스크 건축을 대표하는 중요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현재의 성당은 11세기 페르난도 1세와 산차 왕비 시대에 본격적으로 건립되었으며, 이후 여러 시대의 건축과 장식이 더해져 로마네스크부터 바로크까지 다양한 양식이 함께 남아 있습니다.
특히 이곳에는 레온 왕국의 여러 왕과 왕비가 묻힌 왕실 묘역이 있어 레온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오늘날에도 산 이시도로는 성당 자체뿐 아니라 왕실 묘역과 박물관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역사적인 공간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게 만든 가우디의 카사 보티네스
레온의 거리를 걷다가 자연스럽게 발길을 멈추게 만든 건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가 설계한 카사 보티네스(Casa Botines)였습니다.
중세 고딕 성을 연상시키는 외관에 네 모서리의 뾰족한 탑이 솟아 있어 주변 건물 사이에서도 단번에 눈에 들어왔습니다. 레온이라는 오래된 도시 한가운데 가우디의 독특한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습니다.
카사 보티네스는 19세기 말 가우디가 레온에 설계한 건물로, 처음부터 관광을 위한 건물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1층과 반지하는 직물 사업을 위한 공간으로, 위층은 주거 공간으로 사용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건물은 신(新)고딕 양식을 바탕으로 하면서 가우디 특유의 세부적인 건축 요소를 더했습니다.
특히 건물의 창문은 레온 대성당의 트리포리움 창에서 영감을 얻었고, 정면 입구에는 용을 물리치는 성 조지의 조각이 있습니다. 외관의 화려함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상업과 주거 기능을 함께 고려한 매우 실용적인 건물이기도 했습니다.
카사 보티네스는 가우디가 카탈루냐 밖에 남긴 몇 안 되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건물의 역사와 가우디의 작품 세계, 19~20세기 스페인 미술 등을 소개하는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저희는 내부 관람 대신 외부 전경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우디의 독창성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레온 진입 구간의 도로가 아스팔트라 발이 아픈데, 우회로가 있나요?
A. 네, N-601 국도변을 따라 걷는 공식 도로 외에도 푸엔테 카스트로 진입 전 베르네스하(Bernesga) 강변 산책로나 외곽 마을(Castrillo del Pardo) 쪽으로 우회하는 강변 길이 있습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흙길과 나무 그늘을 선호하신다면 강변 우회 경로를 추천합니다.
Q. 레온 대성당 관람 시 순례자 할인이나 도장(스탬프)은 어디서 받나요?
A. 순례자 여권(크레덴시알)을 제시하면 성당 입장료 할인을 받을 수 있습니다. 순례자 도장은 성당 매표소나 기념품 샵, 혹은 성당 입구 안내소에서 요청하시면 정성스럽게 찍어줍니다.
Q. 레온에서 연박(Rest Day)을 할 때 알베르게 이용에 제한이 없나요?
A. 공립이나 수녀원 알베르게 중 일부는 연박을 제한(몸이 아픈 경우 제외)하는 곳이 있습니다. 따라서 레온에서 휴식을 취하며 2박 이상 머물 계획이라면 연박이 허용되는 사설 알베르게나 호스텔, 민간 숙소를 미리 예약해 두시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합니다.
마치며
황토빛 메세타를 지나 마주한 레온의 풍경은 수많은 순례자에게 오아시스 같은 위안을 줍니다. 묵직한 배낭을 벗어두고 걸었던 레온의 거리는, 우리가 걷는 순례길이 단순한 고행이 아니라 스페인의 살아있는 역사와 문화를 몸소 체감하는 매혹적인 여행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긴 메세타를 지나왔다면 레온에서는 잠시 걸음을 늦춰도 좋습니다. 순례자로서의 다음 길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오래된 도시 레온을 천천히 걸어보는 시간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주는 또 다른 선물이 되어 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