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23] 베르시아노스: 나뭇길의 매력과 36L 배낭의 적응

전날 테라디요스 알베르게에서 경험했던 식은땀 나는 배낭 분실 해프닝은 저희 부부의 순례길 여정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동안에는 20km가 넘는 장거리를 걸을 때 제 짐은 동키(짐 배송)에 맡기곤 했지만, 짐이 제때 도착하지 않아 가슴을 졸였던 그 사건 이후로, 저는 더 이상 동키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고 온전히 제 힘으로 배낭을 메고 걸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제는 배낭의 무게마저 순례길의 한 과정으로 맘 편히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모든 짐을 짊어지고 나선 길이었지만, 다행히 메세타 평원의 고즈넉한 마을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Bercianos del Real Camino)'로 향하는 여정은 참으로 평화롭고 아름다웠습니다.

단조로움 속에서 만난 긴 나뭇길의 매력, 마침내 내 몸에 착 감긴 배낭, 그리고 정겨운 알베르게에서의 웃지 못할 밤 이야기까지... 베르시아노스에서 쌓은 소중한 추억들을 나누어 드립니다.

산티아고 순례길 메세타 구간 베르시아노스 향하는 나뭇길 가로수 풍경

1. 메세타에서 마주한 아름다운 베르시아노스 나뭇길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를 지나 베르시아노스로 향하는 길은 끝없이 아득하게 펼쳐진 메세타 평원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릅니다. 시야를 가리는 커다란 산맥이나 화려한 건물 하나 없이,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만이 시원하게 이어지는 길이었습니다.

단조롭게 느껴질 수도 있는 풍경이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오롯이 나의 발걸음 소리와 호흡에만 집중하며 머릿속 복잡한 잡생각을 하얗게 비워낼 수 있는 참 고마운 구간이기도 했습니다.

매일 걷는 행위 자체가 무덤덤한 일상이 되어갈 즈음, 베르시아노스 마을 인근에서 마주한 긴 나뭇길(Sendero)은 그 자체로 감동적인 선물이었습니다.

길 한쪽에 줄지어 늘어선 가로수들이 길게 늘어트린 포근한 그늘과, 그 사이로 스며드는 따스한 햇살은 광활한 메세타의 황량함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 주었습니다.

파란 하늘 아래 길게 뻗은 나뭇길을 따라 차분히 발걸음을 옮길 때 느껴지던 평온함과 고즈넉한 풍경은, 매일 걸어도 질리지 않는 순례길만의 또 다른 특별한 매력으로 가슴 깊이 남았습니다.

2. 시행착오 끝에 길들인 오스프리 36L 배낭

동키 서비스 없이 온전히 짐을 짊어지고 걸어야 했기에, 한국에서부터 공들여 준비해 온 배낭의 가치가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순례길을 떠나기 전, 내 체형에 딱 맞는 배낭을 고르기 위해 여러 등산 매장을 돌아다니며 오랜 시간 비교한 끝에 선택한 것이 바로 '오스프리(Osprey) 36L 배낭'이었습니다.

남성용과 여성용이 세심하게 구분되어 있어 체형에 맞게 어깨와 허리 끈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매장 사장님께 어깨와 허리 벨트를 메는 정석 방법을 배워왔지만, 막상 무거운 짐을 가득 채우고 걸으려니 처음에는 어느 위치가 편한지 감이 잡히지 않아 길을 걸으면서도 끈을 조였다 풀었다 하며 여러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처음 며칠은 짓눌리는 어깨 통증에 얼마 못 가 쉬기를 수없이 반복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계속 메고 걷다 보니 점차 내 몸에 맞게 착 감기면서 매장 사장님 말씀처럼 무게감이 훨씬 적게 느껴졌습니다.

나중에는 배낭이 마치 내 몸의 일부처럼 편안해져서, 정말 잘 준비해 온 최고의 필수품 중 하나로 기억에 남았습니다.

순례길 착용 오스프리 36L 등산 배낭 착용 모습

3. 시원한 클라라 한 잔과 알베르게의 웃지 못할 밤

긴 나뭇길을 지나 마침내 베르시아노스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저희 부부는 습관처럼 알베르게 식당으로 향해 "클라라 있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전날 맛보았던 스페인 레몬 맥주 '클라라'의 청량함에 완전히 매료된 저희는, 이제 목적지에 도착하면 무조건 클라라 한 잔을 시켜놓고 한숨을 돌리는 것이 순례길의 소소한 여유이자 행복이 되었습니다.

시원한 클라라를 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털어내는 시간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휴식이었습니다. 이날 머문 알베르게는 수십 명이 함께 자는 대형 방이 아니라, 4명이 한 방을 쓰는 아담하고 아늑한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저희 부부는 코골이가 어마어마했던 프랑스 남성 순례자와 같은 방을 배정받게 되었습니다. 여러 명이 자는 큰 방에서는 묻혔을 소리였겠지만, 4인실이다 보니 방 안을 울리는 우렁찬 코골이 소리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뒤척여야 했습니다.

흔히 너무 힘들면 곯아떨어진다고 하지만, 50대가 넘은 저희 부부에겐 낯선 환경에서의 잠자리가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마치며: 귀마개가 선물해 준 소중한 평온

다행히 한국에서 혹시나 싶어 챙겨왔던 작고 알록달록한 '소음 차단 귀마개'가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습니다. 귀마개를 착용하고 나서야 비로소 피곤했던 몸을 깊은 잠 속에 맡길 수 있었습니다.

순례길을 준비하시는 분들이라면, 특히 잠자리에 조금이라도 예민하신 경우라면 가벼운 귀마개 하나쯤 챙겨가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스스로 짊어진 배낭의 묵직함 속에서 느낀 뿌듯함, 나뭇길이 준 평온함, 그리고 시원한 클라라와 소소한 잠자리 해프닝까지... 베르시아노스에서의 하루는 순례길이 가르쳐 주는 자립과 소소한 행복의 의미를 다채롭게 전해주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베르시아노스를 떠나 '만시야(Mansilla)'로 향하는 다음 여정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늘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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